티스토리 뷰

여전히 눈먼 사람들.

주제 사라마구 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이 책의 배경은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배경과 같다.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객이 바뀌었다. 전작에서 주요 인물이자 누구보다도 먼저 눈이 멀어 강제로 집단 수용되었던 사람들이 일선에서 빠졌다. 대신 그들을 통제하는 데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엔 자기들도 눈이 멀어버렸던 정부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기이한 사건 이후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같은 공간을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4년이 흐르고 ‘눈뜬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과연 이 도시엔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저자는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기억하다시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요 사건은 ‘백색 실명’이었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실명이 모든 사람에게 급속도로 전염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반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주요 사건은 ‘백지 투표’다.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 투표에서 이상하게도 수도에서만 투표된 70 퍼센트가 백지였다. 다른 지방은 과거 투표 결과와 비슷했다. 수도에서만 발생한 특이한 현상이었다.

정부는 분개했다. 며칠 후 투표를 다시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투표에선 오히려 15 퍼센트가 증가한 85 퍼센트의 투표용지가 백지로 판명되었다. 백지 투표는 물론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현상을 수도 주민들이 담합하여 정부를 기만하는 반동적인 행위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정한다. 수도 주민들에게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투표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깨닫고 반성한 뒤 다시 ‘착한’ 국민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정한다. 수도를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모든 공권력이 빠져나가 주민들만 남을 텅 빈 수도에 계엄령을 내려 수도를 고립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은밀하게 실행에 옮긴다.

과연 정부가 의심한대로 수도 주민들이 몰래 비밀스런 동맹을 지어 ‘백지 투표’라는 행동으로 국가에 반동적인 시위를 했던 것일까. ‘백색 실명’이 누군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두에게 전염되었듯, 혹시 ‘백지 투표’도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70 퍼센트, 85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전염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시작점은 누구일까. 이 공상적인 질문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 참혹한 열매를 맺게 된다.

전작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안과 의사의 아내였다. 모두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눈이 멀면서 더욱 거리낌 없이 드러난 인간 본성의 추악한 실태를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동시에 살인자이기도 했다.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빌미 삼아 폭력과 강간을 자행했던 남자들의 우두머리를 살해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그녀 외엔 모두가 눈이 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지 투표 상황이 벌어진 뒤, 어떤 한 남자가 공식적으로 정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남자는 가장 먼저 눈이 멀어 신호등이 바뀐지도 모르고 차 안에서 울부짖던 바로 그 사람이다. 편지의 내용은, 4년 전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안과 의사의 아내였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4년 전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가 이번 백지 투표 사태를 조장한 주범이라고 추론할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공상일 뿐이다. 하지만 내무부장관에게는 달랐다. 그는 기어코 이 편지를 시작으로 하여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 여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 사건을 거짓으로 종결지으려는 음모를 기획하게 된다.

음모의 중심에는 내무부장관이 있다. 그가 비밀리에 수도로 보낸 경찰 3명 (특히, 경정)의 심리변화와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이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아마 저자의 숨은 메시지가 담긴 부분이 아닐까 한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질문과 수사 명령.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사인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난 알 수가 없었다.

수사를 책임지고 수도에 들어간 경정은 끝내 자신은 장관이 시킨 임무를 완성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아마도 양심의 소리를 이길 수 없었으리라), 결국엔 정치 공작의 희생양으로 안과 의사의 아내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책은 때론 코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처참한 정치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버젓이 눈뜬 자들임에도 마치 눈먼 자들처럼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 눈을 뜨나 감으나 우리 인간은 눈먼 존재라는 것을 이 소설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동시에, 현실은 그나마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수의 눈뜬 사람조차도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정치판임을 풍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나는 묻는다. 나는 눈뜬 자인가, 눈먼 자인가. 눈을 뜨면 죽임을 당한다 해도 눈을 뜰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계속 눈을 감고 살 것인가.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