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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서보 머그더 저, ‘도어’를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8. 6. 15:21

살아내는 삶, 그리고 타자를 알아가는 애씀에 대하여.

서보 머그더 저, ‘도어’를 읽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나는 낯선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거리에 서있다. 그 거리에 자리잡은 공동주택과, 당장이라도 음식 냄새, 커피향, 여러 꽃향기가 뒤섞여서 날 것 같은 넓은 앞마당, 그리고 그 뒤로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것처럼 언제나 견고하게 닫혀있는 에메렌츠 집의 문이 보인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로 조곤조곤 그 세상을 내게 보여주는 ‘나’, 그리고 에메렌츠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자, 때론 에메렌츠로, 때론 ‘나’의 내밀한 자아로, 때론 인간의 영역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의 뜻을 전해주는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 같은, ‘비올라’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도 보인다. 

이 작품은 공간적으로 꽤나 정적인 구도를 가진다. 앞서 언급한 공간이 소설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장소다. 에메렌츠와 ‘나’, 그리고 비올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하며, 나머지 공간과 시간도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이 책의 저자,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이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여행 길잡이가 되어준다. 독자를 어느새 단 한 사람 에메렌츠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녀를 알아가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에메렌츠를 떠나보낸 ‘나’의 복잡한 심정을 주목하게 만든다. 

역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어떤 오래되고 두꺼운 책 한 권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경이감에 찬 채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 책은 신비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이 책이 제공하는 여행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닌, 비로소 한 사람을 알아가는 끝없이 신비한 여정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나와 타자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여정과 겹쳐진다. 

주제 넘을지 모르겠지만,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이 책에 한 번 빨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아마 나처럼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정적인 이미지 안에는 아주 깊은 우물이 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그 우물의 깊이와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천천히 물을 길어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에 흐르는 시간의 깊이와 그것이 한곳으로 모여 마침내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신비도 이 책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저자 서보 머그더의 분신인듯한 일인칭 화자 ‘나’는 작품 속에서 잘 나가는 전업작가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도 가지지 않고 남편과 단 둘이서만 산다. 오로지 할 줄 아는 건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이다. 청소며 요리며 할 것 없이 모든 집안일이 그녀에게는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해선 그런 귀찮고 하찮은 일들을 대신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수소문을 해서 그 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에메렌츠다.

에메렌츠가 죽기까지 20여년을 함께 살게 된 ‘나’는 에메렌츠와 티격태격하며 그녀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들다가도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에메렌츠는 완전무결하며 무오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립적인 삶을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며 사는 아주 강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 기질까지 보이는 그녀는 거의 모든 제도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습이나 사상 등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하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곤란하다. 그녀는 그런 단어와 삶에서 정반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열정적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이웃에게 관대했고, 기꺼이 나누며 흔쾌히 돕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실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자신의 신앙을 깊게 만드는 동안 그들이 교회에 앉아서 소망하고 기도하고 다짐하던 이웃사랑을 길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말과 수사로 화려하게 도배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뭇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존중과 배려, 희생과 환대를 삶으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은 한낱 인공적으로 조작된 비극 영화처럼 충분히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비관론자, 반엘리트주의자를 자처했고, 뭇사람들의 오해를 쉽게 살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삶을 살았지만, 에메렌츠에게 삶은 단순히 허황된 소망으로 치장한 뒤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위하며 제자리 걸음이나 후퇴를 하는 시공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실제로 살아내는 일상이었다. 이런 면에선, 평론가 신형철도 간파한 것처럼 에메렌츠는 여성 조르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에메렌츠를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가 작품 속 화자 ‘나’를 전업작가로 등장시킨 이유는 저자의 분신이라는 의미도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에메렌츠가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더욱 조명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머리로 대표되는 글만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몸으로 대표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또 저기에 있다. 이 강력한 대비를 알아챈 독자라면, 아무래도 에메렌츠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매력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다분히 ‘나’의 입장에 천착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작품은 단지 그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마치 닫힌 문처럼, 여느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비범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에메렌츠를 궁극적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에메렌츠의 죽음에 대해 과도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영원히 뛸 것만 같던 에메렌츠의 심장이 어느날 멈추는 날이 왔었지만, ‘나’는 에메렌츠를 삶으로 사랑했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책의 후반부를 가득 메우는 그녀의 내면의 독백에서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숙제이며, 머리에서 몸으로 전환되는, 마치 기독교의 성육신 개념과도 흡사한, 과정은 인간에게 있어선 완료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우린 그저 오늘도 애쓸 뿐이다. 타자를 안다는 것의 무게중심은 애씀에 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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