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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기.

그레고리 보일 저, ‘덜 소중한 삶은 없다’를 읽고.

머리말에서 저자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혹시라도 있을 이 책에 대한 오해를 예방하고자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 둘째, 이 책은 ‘갱단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유대감의 범위가 확대되면 좋겠다. 이 책은 조직폭력배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찾아주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고난과 깨진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찾아내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대로 이 책은 수많은 짧은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실제 갱단에 소속되어 있던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임을 주의하라) 사람들의 실화다. 그만큼 하나의 이야기는 큰 임팩트가 있으며, 살아있는 메시지를 가진다. 특히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의 중요한 축이자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덜 소중하다’고 여기는 우리 마음속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제안하고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각 에피소드를 읽어나갈 때 갱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단순히 죽은 이들을 통해 교훈이나 뽑아내는 목적으로는 이 책의 무게가 너무 크다. 만약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받기 위함이라면 당장 이 책을 내려 놓으라. 그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믿음의 선진들을 우상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궈놓은, 누구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세상의 빛나는 저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아닌, 감히 ‘바닥’, ‘절망’, 심지어 ‘지옥’과 같은 단어가 어울릴법한, 어둡고 낮은 곳에서의 변화를 맨눈으로 목도하게 될 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나로선 그저 할 말을 잃고야 만다. 동시에 내 안에선 소요가 인다.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두 세상의 차이, 즉 예수를 닮는다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의 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명징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름 평온했던 내 마음에서 거짓과 기만의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없이 작아짐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책의 큰 축은 저자인 그레고리 보일 신부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존재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소개를 이 짧은 감상문에 굳이 옮겨다 놓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잠깐의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10 여분 정도만 더 검색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레고리 보일 신부는 엘에이 갱단 한복판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과 함께 변화를 일궈냈다. 마치 갈릴리 주민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살고 보여주신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그레고리 신부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너무 닮았다. 그의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다. 그의 과거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예수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확성기에 대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열렬히 외치는 억지스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의 열매를 그레고리 신부는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바쳐 얻어낸 것이다. 그는 떠들지 않고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고도, 혹은 고급스러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누구나 머리 속 어딘가에 파편처럼 떨어져있던 예수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스스로 찾아내고 주워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남들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의 삶은 대형교회에서 자본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선교라는 단어로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선교 현장이었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집중을 해야 한다거나, 저자의 어떤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미 모든 메시지는 머리말과 프롤로그에 다 써져 있다. 1장부터 9장까지의 2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모두 실제 저자와 함께 했으며 저자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은 이들의 이야기로 빼곡히 들어차있다. 각 장들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아마도 많고 많은 에피소드들을 저자가 나름 분류하면서 공통된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각 장들을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총 아홉 장의 제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의 중심된 축을 이루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민’, ‘관심’, ‘유대감’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에게는 아직 이 책을 읽어낼 만한 충분한 공감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연민과 관심과 유대감을 말하면서도 나는 그 단어들의 사용 범위의 경계를 나름대로 ‘안전하게’ 그어두고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 당장 그레고리 신부처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난 이상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일을 해내겠다거나 더 큰 일을 해내겠다는 어설프고 유치한 결단보다는, 난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공감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책을 통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한 점진적인 변화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본다. 언젠가 한 번 엘에이 다운타운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홈보이 인더스트리에 들려 커피와 빵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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