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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 그리고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자 중에서도 존재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다. 이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현경은 인간을 한 번 더 걸러낸다. 바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건, 사람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결코 우생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말이 아니다. 이 논리는 모든 존재자 중에서도 현존재인 인간을 구별한 하이데거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 역시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고자 현존재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나 모든 사물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사용의 맥락 안에서 정의된다고 말했던 그가 인간의 우월함을 과시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별됨이 언제나 상하 관계의 우열을 의미하진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답지 못한 인간이 있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1장 ‘사람의 개념’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됨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문득 나도 사람답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인류학, 사회학 등의 전공 배경이 저자만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나 탄생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역사와 문명은 물론 현 세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통찰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를 살면서 꼭 한 번 쯤은 깊게 생각해 봄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치 논문을 읽는 것만 같은 딱딱함도 책 중간중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 뛰더라도 충분히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공돌이이자 인문학에 문외한인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을 여는 프롤로그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담겨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선 반가운 도입부였고 덕분에 몰입을 잘 할 수 있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기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해설은 빈틈과 오류를 가진다. 기존의 해설들은 그림자를 영혼과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한데 반하여, 저자는 그림자를 오히려 영혼과 대립하는 외적이고 현세적인 그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즉, 그림자의 유무는 인간과 사람의 그 묘한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의 상실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된 이 소설은 이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알레고리를 선사한다. 슐레밀이 그의 괴로움을 칠십 리 장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는 장화 덕분에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슐레밀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이 해결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전제가 되어 있는 셈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슬프게도 슐레밀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를 단념하고 순수하게 관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한다는 말은 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에서는 진정한 소속감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해석하는 김현경에 따르면, 그건 소외와 도피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슐레밀이 브레네 브라운의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진정한 자존감과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림자가 없어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했을까. 반대로 브레네 브라운이 김현경의 해석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막다른 골목인 ‘비장소화’밖에 없다는 김현경의 통찰을 브레네 브라운은 어떻게 생각할까. 브레네 브라운의 이론은 사회구조라는, 인간이 속한 환경이라는 더 큰 숲, 더 큰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무리 홀로 황야를 거치고 이겨낼 만큼 비장한 용기를 낸다고 해도 그림자를 다시 얻을 순 없기 때문이다.

슐레밀의 최종 선택은 스스로 소외당함이었다. 이는 저자에 따르면 ‘비장소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람다움이란 사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즉, 타자의 존재가 필수다.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 역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일 뿐일 것이다. 이를 다시 풀면, 우리 모두는 타자의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의 환대는 타자에게 자리/장소를 주는 행위로 설명이 가능하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저자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 장소, 환대,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로 맞물린 채 사람다움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람다움이란 한 인간이 타자에 의해 장소/자리를 제공받는 행위, 즉 환대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훌륭한 성품이라든지 고결한 도덕성이라든지 지고한 개인영성이라든지 하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단어들은 오로지 사적인 영역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품과 고결한 도덕성, 그리고 지고한 개인영성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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