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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방법 이전에 자질.

 

제임스 설터 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고.

 

‘가벼운 나날’을 읽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신형철의 추천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어오면서 그가 쓴 꼭지 하나하나, 아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의 글을 넘어 신형철이란 사람 자체를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글은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끼리의 신뢰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그동안 조금씩 견고히 쌓여온 신뢰 덕분에 나는 그가 추천한 책 목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었다. 그가 쓴 추천사를 읽고 나서 나는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나의 신뢰는 옳았고, 그 선택은 나의 독서 여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비단 ‘가벼운 나날’이란 한 작품을 알게 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겐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사실이 중요했다. 201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 제목이 “책은 적게 팔렸으나 찬사는 오래 이어진 작가의 작가 90세에 죽다”였다고 할 정도이니, 미국 현대 소설을 거론하면서 아마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제임스 설터가 아닐까 한다. 비록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아무한테나 부여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제임스 설터로부터 글쓰기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한 작가에게 매료되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작가의 전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 그것은 자연스레 하나의 계획으로 자리 잡고, 이미 잔뜩 쌓인 나의 독서 리스트에서도 당당히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후, ‘어젯밤’, ‘올 댓 이즈’, ‘그때 그곳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내 책장에 차곡차곡 들어왔고, 뭘 먼저 읽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 끝에 나는 소설이 아닌 산문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골랐다.

 

이 산문집을 고른 이유는 당연히 제목에 이끌려서다. 언제 한번 소설을 꼭 써야지 하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가지고 있던 터라, 마침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던,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문체의 작가가 쓴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흥분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좁고 다분히 무식한, 동시에 정석 코스가 아니라 교묘한 샛길을 찾아 뭔가를 뚝딱 만들고 싶어 하는 얄량하고 가소로운 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토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4년, 그러니까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89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세 차례에 걸려 강연한 내용을 한데 모은 책이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 절반 정도는 1993년에 ‘파리 리뷰’에서 했던 제임스 설터의 인터뷰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자기 계발서 따위가 아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사실 나는 누가 여러분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오히려 실망은커녕 그에 대한 신뢰가 더 생겨버렸다. 숨은 샛길을 찾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제목이 이해되었다. 소설이 쓰고 싶다면 가져야 할 자질과 준비자세, 준비운동,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건 고된 작업일뿐더러 소설이 작가의 동반자로서 많은 시간을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 그의 경험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질로써 그는 두 가지를 크게 언급한다. 면밀하게 관찰할 줄 알기, 그리고 자기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지기. 아직 내가 완독한 소설은 ‘가벼운 나날’밖에 없지만, 그 한 권만 봐도 이 두 가지는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다. 내가 매료되었던 이유도 그의 일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고유한 문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글은 묵히고,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고, 오래 달리기처럼 수없이 고치고 고치는 작업을 해야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즉시 그가 쓴 절제된 문장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이 오래 묵고 잘 정제된 열매임을 알게 되자마자 머리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볍게 보였던 그 문장들이 전혀 가볍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 번 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질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라는 더 큰 범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나간다는 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카잔차키스와 같은 고전문학 작가들로부터 얻은 영감과 제임스 설터나 필립 로스와 같은 현대문학 작가의 문체가 한데 어우러져 나를 통과하며 부디 무언가 의미 있는 열매가 맺혀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참고: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01189163259183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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