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재해석된 아담의 신학적 의미.


피터 엔즈 저, ‘아담의 진화’를 읽고.

이 책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아담의 진화’라니! 게다가 저자가 피터 엔즈다. 예상컨대,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겐 이 두 가지 (제목과 저자)가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둘 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아담의 진화’는, 저자가 서론에서 명확하게 밝히듯, ‘아담이 진화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목만 보고 불경함을 느낀 나머지 이 책을 포기한 사람은 십중팔구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잘못된 확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이런 ‘묻지 마’ 확신은 건강하게 뿌리내린 믿음이 아닌 맹신에 바탕을 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피터 엔즈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성경해석학자이고, 그는 진화론을 옹호하거나 대변하려고 이 책을 쓰지도 않았다. 둘째, 피터 엔즈가 그의 2005년 저서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의 영감설’의 후폭풍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퇴출당한 이유는 그의 신학적 해석이 기독교 정통신학에 위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떠나게 만든 학교의 한계 혹은 잘못된 확신 (당시 학교의 주류를 이룬 입장과 관점)때문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정직 이전에 개최되었던 교수회의에서도 엔즈의 책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정직을 결정했던 이사회 삼분의 일은 여전히 그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그의 정직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즈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그가 이단이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희생이었다고 해석하는 게 적합해 보인다.

피터 엔즈는 그의 2016년 저서 ‘확신의 죄’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팽배한 잘못된 확신을 죄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행위가 신앙생활에서 장애가 될 때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죄’와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잘못된 확신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의심’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가져야만 할 것 같은 ‘확신’이 오히려 진리를 가리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의 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하고 의심하기를 두려워하는 건 결코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엔즈가 간파한 대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아닌, 여태껏 올바르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믿음이나 신앙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게 되는, 웃지 못할 역설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는 우리를 합리적인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서도 빛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책은 2012년 출판된 것으로 앞에 소개한 두  책 사이에 만들어졌다. 피터 엔즈의 인생에 있어선 중간 단계의 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탁월한 성경해석학자답게 창세기와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 (1부), 또 다른 하나는 바울 시대와 바울의 관점 (2부)이다. 여기서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 의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부터 ‘아담’을 언급해 놓고서 왜 뜬금없이 창세기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논하냐고 충분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엔즈는 이러한 질문을 미리 예상한 듯하다.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진화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곧바로 직행하는 방법보다는 먼저 좀 더 거시적인 배경, 즉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이 쓰이고 그것을 해석했던 당대의 콘텍스트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1부에서 저자는 창세기를 ‘이스라엘의 자기 정의로서의 고대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는 역사적인 부분도 과학적인 부분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어떤 특별한 신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써진 책이다.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을 전적으로 모세가 광야 생활 가운데 기록했다고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보수진보 교단교파를 떠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오경이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단독 저자에 의해서 써진 책이 아니라 이름 모를 여러 저자들을 거치며 쓰였고 나중에 편집된 책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둔다.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재앙 이상의 현실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빼앗겼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으며,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던 그들 자신이 포로로 잡혀간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국가적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이러한 목적 하에 이루어진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를 포함한 많은 성경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 성경의 탄생은 바벨론 유수에 대한 응답으로 국가적인 자기인식의 실천이며, 교회가 신학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문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스스로를 정의한 문서를 가지고 지금 이 시대를 바로 읽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과학과의 조화를 찾는 게 아니라 신학적 연관성을 찾는 것이다. 특히 창조와 아담 기사가 적힌 창세기가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책이라면 그 목적은 신학적인 것이지 결코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진화론을 가지고 들어와 6일 창조나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창세기에서 찾아내려고 하거나 둘을 어떻게든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으며 창세기가 의도한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신학은 그런 식으로는 결코 같이 갈 수 없다. 둘은 일치가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일치를 위해서는 과학이나 신학 쪽에서 무언가를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는 일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화를 위해서는 과학이 과학다운 모습으로, 신학이 신학다운 모습으로 같이 갈 수 있다. 결국 해석의 문제라는 말이다.

성경비평이라는 학문이 종종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학문인 것처럼 오해되곤 했었지만, 21세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 지식들은 19세기에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성경 내부의 집중적인 연구, 정경, 외경, 위경을 포함한 다양한 고대 문헌들과의 비교연구,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기반으로 한 성경의 역사적 연구, 그리고 자연과학적인 증거들을 통한 성경의 재해석과 그로 인해 빚어진 숱한 논쟁들을 거쳐오면서 얻어진 열매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저자는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온 다양한 창세기 해석 중에서도 다음을 강조한다. 

“진화론과 기독교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고대의 모습 그대로 창세기를 바라봐야만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나 짊어질 수 없는 짐을 그 책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로 갖고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창세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 안에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현대 과학의 관심에서가 아닌 신학적 진술로서 창세기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창세기 초반부에 있는 장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문자적 혹은 과학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관해 고대의 표현방식대로 선포한 신학적 진술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쉽게 생기는 갈등, 이를테면 “당신은 과학을 성경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라는 거친 반응이 야기되는 것도 이미 창세기가 과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진화와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토론하기 위해서 우린 창세기가 어떤 장르이며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예상을 재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그 재조정의 첫 번째 단계로 고대의 정황 안에서 창조 기사가 기록되었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아담 기사의 일부 요소는 보편적 관점에서 인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것임을 시사한다면서 이런저런 성경해석학적인 자료들을 들면서 주장한다. 말하자면, 아담은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아담의 육체적 죽음은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은유적 죽음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라거나 인류의 대표라는 의미에서 모두 해방받게 되는 셈이므로 진화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기회조차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직 한국 기독교 정서 안에서는 자칫 불경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 역사를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 등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아담 기사에 대한 해석도 여러 다양한 해석 중 하나로써 일리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2부에서 저자는 바울이 생각한 아담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사실 아담은 구약성경에서 역대상 1:1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 이후에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아담의 불순종이 보편적 죄와 죽음의 근거가 된다면, 어째서 구약은 단 한 번도 아담을 이와 연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의 질문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신학적으로 필요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전제를 배제할 수 없으며, 사실 이것이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첨예하게 이끈 주원인이었다. 또한, 창세기에는 가인의 불순종의 원인으로서 아담의 불순종이 제시되지 않는다. 노아가 당대의 유일한 의인이었다고 적힌 창세기 6장의 내용도 아담이 보편적 죄악의 원인이라면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불순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에 빠졌다면 노아라는 의인은 존재할 수 없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그러한 죄악의 원인을 아담에게서 찾지 않는다. 이렇게 저자는 아담 기사를 무조건적으로 모든 인간의 타락, 죽음, 죄악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에도 허점이 있음을 성경 자체의 모순을 들면서 보여주고, 보편적 죄와 사망의 원인을 아담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복음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바울이 아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명확한 사실은 바울이 아담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 다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라고 해석한다. 시간 순으로 보자면 아담이 그리스도보다 먼저라고 할 수 있지만, 바울이 이해하는 아담은 그리스도로 인해 형성된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당대의 유대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을 자신의 복음 메시지를 정교하게 설명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사용, 해석했다는 것이며, 다른 구약성경을 창의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식으로 인용하였듯 바울은 아담 기사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서를 예로 들며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문제로 특징지어지는 보편적 인류에 속해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에게나 허락된 구속이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고, 바울의 아담이 바로 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이 감히 창세기의 아담 기사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근본적인 이유를 그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예상할 수 없었던 급진적인 구원 행위의 절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해결책을 제공하셨어야 했을 만큼 이에 상응하는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바울은 이 해결책의 본질 때문에 인간이 겪는 문제가 그의 유대 세계관보다 더 폭넓고 깊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의 율법 준수 실패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유대인도 이방인처럼 죄를 짓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인류가 겪는 문제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문제에 빛을 비추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대단한 결말에 비추어 이제 이스라엘 국가의 이야기를 다시 이해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이는 그가 구약성경을 해석한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바울은 창세기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담의 탓으로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창세기는 단순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로써 보편적인 죽음에 초점을 두는 반면,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그를 포함한 우리의 죽음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머물게 된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아담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창세기 저자보다도 더 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창세기 자체의 객관적 해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류가 빠져있던 죽음과 죄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있어 아담은 역사적, 생물학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진화론이 맞냐 아니냐에 대한 답을 원했거나, 어떻게 창세기 아담 기사를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혹은 진화론을 어떻게 창세기를 동원하여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원했다면 반드시 실망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도 서론에서 밝히듯 창조과학 쪽으로 편향된 부류나 진화론을 마치 무신론을 대변하는 주 무기 다루듯 여기는 부류를 상대로 쓰인 책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성경의 대화에 이미 마음을 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자 객관적 사실이며, 진화론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가 계속 쌓여가고 있고 그로 인해 합리적인 추론이 점점 사실화되어가고 있는 이론이다. 더 많은 증거들은 앞으로도 계속 쏟아질 것이다. 그동안 여러 독립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발견된 많은 점들 (생물학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하나의 굵은 선 (진화론)을 그려가고 있다. 자정기능이 그 어느 영역보다도 잘 작동하는 과학을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다는 명목 하에 무시하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두려움에 이끌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길 거부한다면, 그 믿음은 더 이상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나아가 자기 자신의 신앙까지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창세기가 적힌 목적과 더불어 당대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답은 모든 의문을 다 풀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인 피터 엔즈 역시 이 책에서 하나의 해석을 친절하게 풀어나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해석도 해석일 뿐이라는 점은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편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해석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고 귀 기울이며 잘못 각인된 맹신과 반지성의 뿌리를 계속해서 뽑아나가는 것에 방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길 원한다. 가장 과학다운 과학, 가장 신학다운 신학,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