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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완성도와 깊이: 보도를 넘어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으로.
황정은 저, ‘연년세세’를 읽고.
이틀 전,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함께 느리지만 행복하게 보낸 열흘을 뒤로하고, 내가 집어 든 책은 황정은의 신작 ‘연년세세’였다. 신형철의 소개 덕분에 재작년에 ‘백의 그림자’를 읽고 단번에 나는 황정은의 문체에 반했다. 묵직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나 상황을 평이한 단어와 친숙한 단문으로 덤덤하게 기술하는 그녀의 글은 한강 작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해 출간되었던 ‘디디의 우산’을 읽고 나서는 내 기대가 조금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매혹되었던 황정은의 문체는 그대로였는데,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전개가 나의 공감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상했다. 나는 그것이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내 공감능력이 부족한 걸까, 이해력이 부족한 걸까, 하는 답이 없는 고민들). 그 생각은 잊히지 않고 일종의 짐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중고서점에 방문한 날, 작년에 출간된 황정은의 최신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제를 해결하는 심정으로 나는 책을 구입했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황정은의 작품 ‘연년세세’. 농숙해진 그녀의 문체와 적확한 문장의 선별은 작품의 간결성과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고, 한국 정서에 잘 부합하는 내용과 이야기 전개는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머릿속에서 겹쳐졌고, 이 책을 쓴 황정은의 숨은 의도가 한국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린 서민들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백의 그림자’도, ‘디디의 우산’도 모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상을 그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상을 겨우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덤덤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연년세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읽히는 작품이었다.
고전 문학이나 현대 소설이나 가릴 것 없이, 내가 읽은 대작의 대부분은 시대 정황을 잘 반영한다. 진공 속의 이야기나 관념만으로 이뤄진 작품은 없었다. 역사성과 현실성이 독자들의 공감을 사며 작품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황정은의 작품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땐, 황정은만의 개성 있는 문체와 더불어 시대 정황과 맞물린, 그러나 자칫 잊히기 쉬운 서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 시대에 그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가 존재하여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이야기들을 남길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작품 같은 경우엔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 읽고 깊은 공감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한 우려다.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잊히는 작은 목소리들을 담아낸다는 의미는 충분히 크다고 할 수 있지만, 황정은이 담아낸 그 작은 목소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를 그리 묵직하게 건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옆집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사연 깊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정도의 효과만이 내게 남아 있다는 점이 나는 못내 아쉽다. 다음 작품에선 한국인만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호소할 수 있는 주제를 다뤄준다면 황정은만의 매력적인 문체가 더욱 빛을 더 발하지 않을까 싶다. 완성도 높은 보도 형식의 이야기만이 아닌, 좀 더 깊고 보편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좀 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다루는 이야기들)를 기대해본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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