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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이유.
김학천 글, 황은관 그림,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를 읽고.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간.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마저도 마치 그 안에 깃든 영령을 추모라도 하듯 목소리를 아끼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 간혹 붓으로 그린 듯 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던 그 공간.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났던 부모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은 탑과 숱한 이름이 적힌 위패와 그들이 조각된 커다란 조형물에 둘러싸인 채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버스비만 들고 혼자서 훌쩍 떠난 즉흥적인 일탈에서 나는 부산 중앙공원 (구 대청공원) 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충혼탑을 찾곤 했다. 충혼탑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부산 출신의 국군 장병과 경찰관을 비롯한 애국 용사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최근 선율 출판사에서 의미가 깊은 책을 하나 냈다. 수작이다.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길 위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어서 부제를 확인했다. ‘이야기가 있는 답사 여행’. 금세 이해가 갔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담은 딱딱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16명의 독립운동가를 선택하고 그들의 자취를 따라 직접 길을 나서 답사를 한 뒤, 그로부터 얻은 살아있는 감상을 절제된 글로 담아냈다. 역사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 길 위로 나서길,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답사에 동참하길 촉구한다. 책은 독립운동가 한 분 당 한 꼭지, 그러니까 총 16 꼭지로 되어 있다. 각 꼭지의 마무리는 저자가 답사 때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그의 답사 여정과 간단한 안내 및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각 독립운동가에 대해 그려진 포스터가 압권이다. 잘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글을 배가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대학생 때 가끔 찾던 충혼탑에서의 그 숙연함이 자연스레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영혼은 독립운동이나 한국전쟁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있게 한 든든한 바탕이 되어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해진다. 감히 공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은 내가 살아낸 시대와 많게는 백 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 슬프고도 허망한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의 피 위에 서 있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반면, 독립운동과 정반대 편에서 앞장섰던 친일파들의 부와 권력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논리는 나라와 상관없는 사적인 욕망과 합쳐졌고, 어려운 시기에 많은 이들은 그 조류에 순응하거나 편승하여 그른 것을 옳다고 했고 옳은 것을 그르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아 실세를 쥔 사람들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큰 소리를 떵떵 치며 살아가고 있는 반면, 조용히 정의를 위해 사욕을 포기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은 가난과 헐벗음을 견뎌내야 했거나 비굴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 책과 같은 글을 읽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거를 부인하거나 거짓 과거를 발판 삼는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젠간 와해되거나 붕괴될 것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덮어두지 말고 겸허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실수가 있었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현실의 무게와 그동안 지속해왔던 거짓 합리화의 압력, 그로 인한 거짓 평화의 힘을 이겨내야만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에 대해 떠올릴 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이유도 어쩌면 그릇된 역사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횡포와 그 횡포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독립운동가들의 피, 그리고 피의 흔적들이 여전히 산재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언론만 보고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다. 거짓 뉴스가 난무하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는 과학자나 정치인이 아닌 빌딩 소유주가 적히는 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독립운동,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시대를 달리 하며 이어져온 정의에 기반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현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된 역사의 기술과 전달이 중요한 이유는 물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 혹은 '저항'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 있다면 시간 내어 저자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답사 여정을 따라 몇 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 책상 위보단 길 위에서 그 정신은 살아나 나에게 말을 걸 테니까 말이다.
#선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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