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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5. 11. 09:32

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한정원 저, ‘시와 산책’을 읽고.


아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 조용히 압도되는 느낌.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휑한 아름다움. 이내 그친 눈처럼 아쉬우면서도 고독함과 애잔함을 잔뜩 머금고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나는 경건한 자가 되어 입을 봉하고 눈과 귀만 열어 작가가 그려놓은 세계로 다소곳이 나아간다. 이 책의 감상을 적기에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고, 또 젖어보기를 택하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몇 자 적어본들 하얀 눈에 섞인 까만 먼지가 될까 봐, 그래서 부서질까 봐 염려가 된다. 부디 이 짧은 감상문이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가와 요코의 산문집,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를 읽고 곧장 분위기를 이어 표지부터 파랗고 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책을 골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무너질 땐, 오케스트라의 거창한 연주나 화려하고 높은음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독주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적당히 느린 피아노 곡에 손이 간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수십 권의 책 중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제목부터 와 닿았다. ‘시와 산책’이라… 처음 보는 작가, 처음 보는 출판사.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 낯섦이 나를 묘하게 끌어당겼다. 하얗고 깊은 숲에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 양 날개에는 아무런 소개도 없다. 텍스트로 승부하는 간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첫 꼭지를 읽고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휑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지새워도 충분히 용서가 될 것 같았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를 읽고 에세이의 정수를 맛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정원의 에세이를 읽고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정수’라기보다는 ‘정수 중 하나’로 말이다. 두 에세이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느낌이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오가와 요코의 글에서 사람이 느껴진다면, 한정원의 글에선 혼자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 적막하고 외롭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본,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해내고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오가와 요코와 수도자가 되기로 작정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로 사람이 아닌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한정원. 에세이는 그 사람의 숨결과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책 전반에 배어 있는 이 서로 다른 느낌은 아마도 두 작가의 삶의 흔적과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 테다. 두 에세이를 연달아 읽으며 나는 서로 다른 두 인생과 두 사람과의 조우를 통해 한층 더 깊고 풍성해진다.


글의 간결성과 절제미, 간접적인 표현 안에 숨은 도발적인 직접성. 시 같은 에세이. 에세이 같은 시. 마침 오가와 요코와 한정원의 책이 ‘산책’이라는 단어를 공유한다. 오가와 요코의 정겨운 산책이 있는가 하면, 한정원의 고적한 산책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인생을 그렇게 두 가지의 산책처럼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두 책 모두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놓아두었다. 종종 꺼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따스한 시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휑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서.


#시간의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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