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개혁의 작은 시작

레프 톨스토이 저, ‘부활’을 읽고

톨스토이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적 자아,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 모든 행복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는 동물적 자아. 두 자아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어떤 자아가 우위를 점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내면은 물론 삶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아주 가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깨어날 때가 있는데, 이는 새로운 삶으로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단, 그 깨어남이 머리 혹은 가슴만 적시고 마는 게 아니라 손과 발까지 내려와 실천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부활의 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어엿한 군인이 된 네흘류도프가 모처럼 고모 집에 들른 건 3월 말 부활절을 코 앞에 둔 수난 주간의 금요일이었다. 마침 진격 중인 연대에 합류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고, 고모들이 그의 방문을 원하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릴 적 그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겨 주었던 까쮸샤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은 양녀 반은 하녀로 자란 까쮸샤는 훨씬 매력적인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앞치마를 보면 옛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발소리나 목소리나 웃음소리만 들어도 기뻤으며, 특히 미소 지을 때 드러나는, 약간의 사시가 섞인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룻밤만 묵을 작정이었던 계획을 바꿔 이틀 후 부활절까지 고모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생활과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생긴 그의 광적인 이기주의는 그의 동물적 자아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그 무렵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까쮸샤를 만나고 예전의 감정을 되찾게 되면서 네흘류도프 안에 조용히 잠자고 있던 정신적 자아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은 그의 부활을 반기지 않았다. 성스러운 부활절 밤이 지난 직후 무서운 사건이 그에게 벌어졌다. 그 사건은 모처럼 네흘류도프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정신적 자아를 마구 짓밟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랑을 가장한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한 채 네흘류도프는 그만 까쮸샤의 몸을 농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그녀의 품에 백 루블이라는 돈을 떠안기면서 그녀의 감정까지 모욕한 채 떠나버렸다. 세상일이란 다 그런 거라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는 거라며, 귀족 특유의 무책임한 합리화에 몸을 맡기면서.

명백한 성폭력이었던 그 사건 때문에 까쮸샤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네흘류도프의 고모들은 까쮸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가차 없이 내쫓아버렸다. 시간은 동일하게 흘렀다. 간신히 이웃의 도움으로 까쮸샤는 출산을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정신적인 변화를 겪은 그녀는 더 이상 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만난 모든 여자들은 그녀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았고, 그녀가 만난 모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버림받은 몸으로 의식주가 어려워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셨다. 사내들과 더불어 점점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잠시 괴로움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까쮸샤는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다. 

이 작품은 부활절 밤 네흘류도프와 까쮸샤 사이에서 발생했던 돌이킬 수 없는 그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을 현재로 하고 있다. 배심원으로 참석한 재판에서 네흘류도프는 우연히 까쮸샤를 만나게 된다. 작품의 시작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피고인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까쮸샤는 그날 벌어졌던 배심원과 재판관의 성의 없는 실수 때문에 억울하게도 유형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네흘류도프는 전율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며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 기억은 그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었던,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거운 죄를 일깨웠고 그 죄를 마음속에 지닌 채 안일하게 살아왔던 지난 10 년간의 삶을 이루던 자신의 매정함과 잔인함과 비열함을 인정하도록 압박했다. 그의 마음속에선 아주 오랜만에 또다시 두 자아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네흘류도프는 그 예기치 못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라도 죄를 속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시베리아 유형수로 판결이 난 까쮸샤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엔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추악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한 짓이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신비한 ‘영혼의 정화’ 현상을 경험하자 순간적으로 기분이 매우 상쾌해지고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뿌리 깊고 역겨운 비열함을 인정하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동시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유와 해방과 용기와 삶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내면에선 부활이 실제로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네흘류도프는 비록 내면에선 지속적인 두 자아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지만 매번 정신적 자아의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세계로의 이동은 기존 세계에서 잘 작동하던 시스템을 버리거나 파괴해야만 하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네흘류도프는 그것들을 하나씩 해내기 시작한다. 역시 귀족 자제인 미시와의 결혼을 포기했고, 까쮸샤와의 과거를 남들에게 숨기지 않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받는 뭇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화려한 집은 물론이며 지주로서 가지고 있던 땅도 농민들에게 헐값에 나눠주는 등 갈수록 정의로운 일이라 믿는 일에 확신을 가진 실천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정신적 자아의 승리는 비단 까쮸샤라는 한 여자에게 범했던 과거를 속죄하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영혼의 정화 작용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에서 한 귀족과 한 평민의 일로, 그리고 그 당시 러시아 귀족 신분과 평민 신분 간의 대립으로, 나아가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으로 확장,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작은 하나의 둑이 무너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너져야 할 견고한 시스템을 가진 모든 불의한 댐들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까쮸샤 덕분에 감옥 안에 갇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그들을 실제로 도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단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이었고, 설사 인지한다고 해도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 그 세상은 변혁되어야만 하는 세상이었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엔 그것을 하는 데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각오까지 하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의 신분은 물론 자신이 그동안 해온 태만과 기만과 교만의 죄를 낱낱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네흘류도프 혼자만의 죄가 아니라 모든 가진 자들의 죄였다. 네흘류도프의 눈은 바뀌었다.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비로소 개인의 죄가 아닌 구조적인 악의 실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구조적인 악 중에서도 네흘류도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까쮸샤 덕분인지 형벌에 관계된 시스템이었다. 그의 질문은 매우 단순했다. 즉 자신들이 괴롭히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련의 사람들이 왜, 그리고 무슨 권리로 그들을 투옥하고 괴롭히고 유형을 보내고 매질하고 살해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였다. 그는 여러 논문과 책을 탐독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문헌들 속에는 지혜롭고 이론적이며 흥미로운 점이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보다 깊어져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만일 그들도 공직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들 대부분은 본래 온순하고 착한 사람들이지만 공무를 처리한다는 이유로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그들은 직무와 의무를 인간애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인간을 대할 땐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랑은 인간 생활의 기본 법칙이다’라는 결론에까지 봉착하게 된다. 

까쮸샤의 억울한 판결을 돌이키려 네흘류도프는 원로원에 상소를 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절망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가망 없을 것 같았지만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한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탄원서가 받아들여졌고, 까쮸샤는 시베리아 유형수가 아닌 이주형으로 변경되어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기적이 일어난 듯했다. 그러나 까쮸샤는 그 사실을 온 맘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수차례 감옥을 방문하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대열과 함께 이동하는 길고 긴 여정에서 까쮸샤에게 모든 진심을 털어놓고 결혼하자는 제안까지 했었다.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까쮸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그녀를 돕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와 참회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기뻐하고 감동하여 옛날의 까쮸샤로 돌아갈 거라고 기대했었다. 지난 10년이란 세월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네흘류도프의 부활이 까쮸샤의 부활로 이어지기 위해선 까쮸샤 역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고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을 결단해야만 했던 것이다. 까쮸샤는 네흘류도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네흘류도프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이었다.

“내게서 물러서. 난 유형수고 당신은 공작이야. 당신은 이곳에 아무런 용건도 없어. 당신은 날 통해서 구원을 받고 싶은 거로군. 이 세상에서 나를 희롱하더니, 저세상에서는 나를 통해 구원을 받겠다는 심보야! 난 당신이나 그 안경, 그 반질반질하고 추한 낯짝까지 모두 증오해.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물론 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했던 말이었고, 실제로 까쮸샤는 네흘류도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유형수인 자기와 결혼한다면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그런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황제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석방될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알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부활이 꿈틀대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품은 네흘류도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까쮸샤 문제가 끝이 났지만, 그에겐 다른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귀족 신분으로서 상류 사회에 뿌리 깊게 각인된 불의를, 그 죄악을 척결하기 위한 일들이 그의 활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해답을 얻는다. 죄악으로 죄악을 바로 잡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인류가 고통받는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한다든지 교화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이제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남에게 벌을 주거나 남을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게 되었고,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부활’이라는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듯이 기독교 정신이 깊게 녹아든 소설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한데, 첫 번째 장편 ‘전쟁과 평화’는 그가 36-41세에, 두 번째 장편 ‘안나 카레니나’는 46-49세에 쓰였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인 ‘부활’은 거의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그가 67세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71세에 마쳤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20년이란 세월이 톨스토이에게 있어선 부활과도 같은 삶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작품 ‘부활’은 그가 그 20년간 깨닫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농축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이 그렇듯, 작품 속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역할했던 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구조적인 악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그 원인이 가진 자들의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이 모든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네흘류도프와 같은 가진 자들의 부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봐도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우리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진 자들은 합법적인 차별과 처벌을 일삼아 가지지 않은 자들을 혐오,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은 더욱 견고해져서 그것이 사회 전체의 동물적 자아로 둔갑하여 모든 사람들 내면에 있는 정신적 자아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초중반은 물론이며 후반부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인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 말이었고,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근본적인 차별은 그대로 남아 어쩌면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양산하고 있었던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의 메시지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