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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코맥 매카시 저, ‘로드’를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9. 23. 02:17

종말의 의미

코맥 매카시 저, ‘로드’를 읽고

종말의 잔상이라고 해야 할까, 종말 이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전히 종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종말은 무한한 시간으로 확장된다고 말해야 할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작품 속 지구는 대재앙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거의 모든 것은 불에 탔거나 불탄 흔적인 재로 덮였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람마저도 오직 소수만이 남았다. 그들은 모두 방랑자 (‘방랑자’라 쓰고 ‘부랑자’라 읽는다)가 되어 간신히 생명만을 부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된 듯하다. 살아남은 자들이 마치 선택받은 것처럼, 혹은 무언가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살아남은 자’라는 표현보다는 ‘뒤늦게 죽어가고 있는 자’ 혹은 ‘미처 죽지 못한 자’라고 표현해야 더 적당해 보인다. 저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까지 어쨌거나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식물이 멸종한 듯한 지구. 과연 인간은 무엇을 먹으며 연명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생존자들은 대재앙과 약탈자들이 미처 건드리지 못한 통조림이나 바닥에 더럽게 떨어진 곡식의 낱알 따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그런데 그건 약과다. 아이를 잡아먹는 어른들도 있다. 힘없는 타자를 가두고 죽여서 잡아먹는 인간들도 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본능에 충실한 삶. 아니, 짐승보다 못한 추악한 존재자의 삶. 어쩌면 유일한 현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삶. 과연 이를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힘없는 생존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한다. 죽임을 당하여 얼마 없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기게 되거나 잡혀 먹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지낼 수도 없다. 버려진 집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없다. 아무리 추워도 함부로 불을 피울 수도 없다. 무기를 가지거나 힘센 자들에게 ‘나 여기 있어’, 하는 표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계속 이동하는 것뿐이다. 목적지는 없다. 대재앙은 모든 곳을 덮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춥고 배고프고 아파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하루 종일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먹을 것을 찾아내는 일과 들키지 않고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다. 즉 생존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에도 늘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살아남은 누군가는 아군이 아니다. 일단 적군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확정해버린 상황. 마지막에 남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일까. 야만인이 되어버린 인간들.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들.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암시조차 없는 완전한 절망의 세상. 먹고 입고 숨 쉬는 생존이란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는 건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종말은 자연재해로 닥쳐온 대재앙이 아니라 어쩌면 이러한 인간들의 인간성 상실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곱씹어보게 된다. 의미 중독자인 인간들의 살아남은 상실감.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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