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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정유정 저, ‘완전한 행복’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9. 28. 14:21

지옥으로 이르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저, ‘완전한 행복’을 읽고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그렇잖아도 어젯밤부터 가랑비 젖듯 불안이 시나브로 스며들어 몸과 마음이 무거웠는데, 급기야 잠든 동안 그것이 꿈의 한 장면으로 발현한 것이었다. 새벽에 큰 소리를 지르며 잠을 깼다. 쿵쾅대며 요동치는 내 심장 소리는 밤의 적막을 갈랐다. 꿈이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잠든 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났더니 머리가 지끈댔다. 아뿔싸. 편두통이었다. 잊힐만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불청객.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루 병가를 내고 약을 먹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오후 1시. 그나마 머리가 개운하다. 날씨는 캘리포니아 답지 않게 비라도 내릴 것처럼 우중충하다. 회색 하늘, 서늘한 대기. 음산함마저 느껴진다. 텅 빈 집. 이 시간에 집에서 혼자 잠에서 깬 적이 있었던가. 다시 꿈에서 본 그 도둑이 떠오른다. 어젯밤 읽은 책에서 본 ‘도둑년’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그 단어 이면에 놓인 신유나의 섬뜩한 본성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일까. 심장이 귀에 달린 듯 다시 요동하기 시작한다. 지유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되강오리의 울음소리도 혹시 이와 같지 않았을까.

정유정의 작품은 음산한 매력이 있다. 독자를 여유 있게 휘어잡는다. 점점 코너에 몰린 채 어지간한 독자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압도적인 서사, 치밀하게 인간의 악한 본성을 하나씩 하나씩, 마치 뼈를 발라내듯 끄집어내는 탁월한 필체.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에 이은 그 정유정이 이 작품 ‘완전한 행복’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진화한 모습으로. 진화한 건 그녀만이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이 직접 밝히듯 이 작품엔 지독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해도 주인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 인물 저 인물에 맞춘 초점이 빈번이 이동하면서 현장의 입체감과 객관성을 살려낸다. 한 대의 카메라가 아닌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같은 현장을 찍는 것처럼. 역사와 기억은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기 마련인데, 아마도 정유정은 이에 대한 저항이자 반격으로 이런 소설적 장치를 고안해낸 게 아닌가 싶다. 덕분에, 비록 허구이지만, 현장감은 갑절이 되어 살아 숨 쉬게 되었다. 지금도 벌렁대는 내 심장은 바로 그 증거다.

미성숙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 그 미성숙함은 나르시시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중엔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애에 빠진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등의 표현을 들을 때 부정적인 감정은 물론 분노까지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남의 일처럼 여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의 신유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선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내면은 고요한 살인자의 광기로 충만하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타자의 인격을, 아니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내면을 가진 사람은 이미 살인을 행한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신유나는 이에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걸리적거리면 제거한다. 그것도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더욱 무서운 건 그녀는 사람을 죽일 때도 떨지 않는다는 점이다. 숨이 가빠지지도 않는다. 내가 그녀의 광기를 고요하다고 표현한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조차 도끼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인간적인 망설임, 저지른 뒤의 갈등과 후회를 경험했다. 그러나 신유나는 달랐다. 신유나는 ‘종의 기원’에 등장한 악의 화신 한유진과 같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대신, 그녀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후천적으로 겪게 된 일반인이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어서 그대로 아래에 옮겨본다.

“이 소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 노력한 어느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흔히 자아도취형 인간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르지만,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의미가 좀 다르다. 통념적인 자기애나 자존감과도 거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모든 사이코패스들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다. 그들은 사이코패스보다 흔하다는 점에서 두렵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자아는 텅 비어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며, 매우 매혹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존재다. 그들에게 매혹된 이는 가스라이팅에 의해 길들여지고, 조종되고, 황폐화된다. 때로는 삶이 통째로 흔들린다.”

위의 언급은 모두 작품 속 신유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 그녀의 외모는 매혹적일 만큼 훌륭하다. 남성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매력은 그녀의 장점이 아니라 그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자기를 공주 혹은 여왕의 자리에 앉혀놓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자기를 떠받들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즉 가스라이팅으로 타자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여 그 사람의 개성과 인격과 자존감을 무참히 짓밟게 하는 수단이 된다. 신유나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세 명의 남자 (전 남자친구, 전 남편, 남편)는 모두 이 수단의 희생자가 되었다. 비록 현재 남편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의 삶은 무너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신유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재혼한 남편의 아들마저도 망설임 없이 죽인다. 어릴 적부터 그녀가 ‘도둑년’이라고 부른 자신의 친언니마저도 거의 죽여놓는다. 완전한 자신의 소유라고 믿는 자신의 딸, 지유마저도 그녀는 쌍욕을 해가며 죽이려고 했다. 한 마디로 그녀와 가까이 있던 사람은 모두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황에 일방적으로 놓여야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유나가 진심으로 원한 건 행복이었다. 완전한 행복. 그녀는 행복은 뺄셈이라고 말한다.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빼나가는 것. 그래야 닿을 수 있는 곳이 행복이라 믿었다. 바로 여기에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았을까 싶다. 완전함이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시작해야 옳겠지만, 아마도 신유나의 완전함이란 그녀가 중심에 있는 우주를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녀가 신이 되어 보기에 좋은, 그 완전한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의 선은 그녀가 중심이 된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반면, 악은 그녀가 중심에서 빠진 그 무엇일 것이다.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게 된 인간. 마치 원죄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신유나는 인간의 본성의 원시적인 상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죄와 악의 기원까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행복이란 무결점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부족한 것들이 산재해 있어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안고 품는 것에 행복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닌 타자의 동등함을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에 행복이 머물지 않을까. 그러므로 행복이란 뺄셈이 결코 될 수 없다. 다양성과 풍성함을 다 쳐내고 마지막에 남을 그 무엇은 행복이 아닌 오로지 나로 가득한 죄가 아닐까. 아무래도 신유나는 틀렸다. 행복은 뺄셈이 아닌 덧셈일 것이다. 나 혼자선 결코 이를 수 없는 영역으로의 타자와 함께 함. 존중과 배려와 사랑이 더하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정유정 역시 인간의 행복엔 타자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 남은 세상은 천국이 아닌 지옥일 테니까.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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