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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의미

파트릭 모디아노 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 기억할 과거가 없는 사람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과연 그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보편적인 가치를 개별적인 상황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땐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자칫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여전히 과거로 사는 사람에게나 적합할 말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면, 그건 자신의 뿌리를 잊으라는 말과 같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기억을 찾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건 집착이 아니라 본능이다. 철이 들고 고독을 알게 되고 고개 숙여 저 아래 놓인 인생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될 즈음이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의 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의 현재는 곧 과거를 되찾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이다. 연결되지 않으면 현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미래 역시 현재의 연장일 뿐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곧 현재가 되고 미래를 살아낼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은 과거를 잃지 않은 자들의 한낱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시작할 근거가 없을 때 우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서사와 묘사의 균형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고유한 필체, 말하자면 그 작가만의 색채가 더 중요하다. 저마다 다른 작가의 색채가 풍성한 작품의 향연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번에 처음 만난 파트릭 모디아노의 색채는 내게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낙엽마저도 사라져 버린 황량한 거리 위에 서서 혼자 추운 겨울을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지독하게 파고드는 고독과 쓸쓸함. 그 아래에 깔린 불안과 두려움. 파트릭 모디아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를 통해 조용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작가의 의도된 불친절함과 그것 때문에 뜻 모를 당황스러움을 안고 한 페이지씩 읽어나가다 보면 불완전한 과거의 조각들이 조금씩,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그림을 그려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땐 이미 내가 작품을 읽고 있는지 작품이 나를 읽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짧은 문장들과 짧은 장들이 던져주는 삭막한 고요함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어느새 페드로가 되고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었는지조차 망연해지는 순간도 찾아오고, 이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 나의 과거인지 현재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분명한 단서를 손에 쥐어도 그것과 연결된 사람이나 장소는 사라졌거나 바뀌었다. 시간은 모든 걸 퇴색시키는 법이다. 나를 나로 증명해줄 존재는 내가 아닌 나를 기억하고 있을 타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 유일한 희망의 끈이 허망하게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나를 나로 알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작품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과거에 거주했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위치한 장소로 가게 될 것을 다짐하곤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기억할 수 없는 과거. 그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가 이처럼 묵직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과거의 무게가 이리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나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조각들. 나 역시 어떤 면에선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그렇다. 다행히 기억하려고 하면 불완전할지라도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놀랍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여기, 이 순간도 시시각각 과거로 물들고 있다. 지금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또 한 번 아쉬워한다. 조바심이 난다. 그럴수록 오늘을 더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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