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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일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토니 모리슨 저, ‘빌러비드’를 읽고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애를 많이 쓰면 끝내 치료할 수 있을까? 마침내 지워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일찌감치 지우길 포기하고 안고 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그 상처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 상처가 ‘과거’라면 ‘현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미래’는? 끝까지 칼을 갈고 눈에 불을 켠 채 지울 수 없는 과거와 싸우면서 복수하듯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처절했다 하더라도 과거 따윈 잊어버리고 현재를 새롭게 살아내야 할까?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재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현재를 살아내는 건 가능한 일일까? 설사 의도적인 기억상실증 환자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현재는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렇게 과거를 잊은 현재는 과연 해방받고 자유로운 삶일까? 혹시 그 현재야말로 과거에 묶여있다는 직접적인 증거 아닐까? 어떻게 해야 아픈 과거에서 해방받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지울 수 없는 과거는 단지 잊고 안 잊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깊은 상처를 남긴 과거는 망각으로 지울 수 없다.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지우는 건 잊는 게 아니라 이겨내는 것이다. 이겨내는 것은 과거에 묶이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며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받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깊은 상처도 마찬가지다. 결코 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잊으려는 온갖 노력, 혹은 잊지 않고 어떻게든 분노를 간직한 채 복수를 위해 백인들을 응징하려는 노력으로는 어쩌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일처럼 여기며 넘어가서도, 혹은 마치 그 일들이 지금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매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비단 흑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다루는 문제는 곧 미래로 이어질 현재를 살아내는 시작점과 동기와 방향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 (Beloved)’를 읽었다. 450 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분량은 수년간 많은 장편소설과 고전문학으로 맷집이 다져진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인 토니 모리슨조차 직접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공식적인’ 노예제도, 그리고 그로 인해 흑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한 ‘합법적인’ 차별을 21세기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한국인인 내가 깊이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얕은 공감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혹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거대한 폭력을 다루는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일하게 겪는 난항이었다.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전혀 다른 독자인 내가 이 정도였으니, 이 작품을 직접 읽은 흑인들이나 미국인들, 혹은 여러 소수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마음이 무너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생채기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허투루 읽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이 들어도 예의를 갖춰 소중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종일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것이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흑인 노예제로 인한 깊은 상처를 저자의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게 이 작품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저 사라진 과거와 그 상처 받은 영혼들을 위한 묵념을 하게 만드는 수준을 훌쩍 초월하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들의 아픔을 말하지만 그것을 미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아왔던 흑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차별받고 억압받고 노예로 사는 삶의 일상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드러내는 이유가 흑인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강조하는 데에 있기보다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역시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백인들을 향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들로부터 억압받던 흑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억압한 게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 동등한 사람을 차별했던 역사가 곧 흑인들이 겪어냈던 과거라고. 과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분노하기 전에 그 과거의 실체를 정확하게 봐야 한다고. 그래야 그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살아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목숨 건 도망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세서. 그 도망의 길 위에서 태어난 아이 덴버. 간신히 도착한 124번지. 어느 날 세서를 잡으러 124번지를 찾은 백인 노예 주인, 학교 선생. 세서는 자기 자신은 매질과 강간을 당하고 더럽혀져도 자신이 낳은 네 아이만은 그렇게 살도록 놓아둘 수 없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빠른 판단을 내리고 즉시 행동에 옮긴다. 직접 아이를 죽이는 일이었다. 세서는 아이들이 길러진 후 비인간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자기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톱으로 여자 아이의 목을 썰었다. 아이는 죽었다. 나머지 아이들도 죽이려 하던 찰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차단되고 세서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녀가 행한 일은 과연 살인이었을까? 살인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재구성한 이야기다. 실제로 유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 곧 사물이었으므로 그 사건을 살인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 일을 행한 노예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딜레마인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판은 이 논쟁 때문에 이례적으로 길어졌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한다. 실제 사건에서 결국 마거릿 가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노예로, 즉 재산 혹은 사물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명백한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 이 기막힌 사건. 그러나 작품 속에서 토니 모리슨은 세서를 사람으로 인정받게 만든다.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풀려나게 만든다. 대신, 출옥 후 세서의 상태와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흑인들의 삶도 보여주지만, 작가는 세서의 삶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세서이기도 하지만, 소설에 흐르는 전체 서사가 세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세서에게 ‘스위트홈’에서 같이 노예로 살았던 폴 디가 찾아온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을 다시 놓아도 되나, 하는 마음까지 들던 찰나, 서커스 구경을 하고 124번지로 돌아오던 날, 집 앞에 한 흑인 여자 아이가 자고 있었다. 빌러비드였다. 덴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았다. 그녀는 엄마가 톱으로 죽였던, 이제는 살아 돌아온 언니라는 것을. ‘빌러비드’는 사실 돈이 없던 세서가 자기가 죽인 딸의 비석에 새긴 유일한 문구였다. 세서는 그 짧은 단어를 새기기 위해 돈이 없어 반강제적인 강간을 선택했다. 그 짓을 한 번 하게 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비문을 새겨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덤 속에 있던 아이가 버젓이, 비록 모르는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환생한 것이었다. 세서도 나중에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서가 그녀에게 가진 건 오로지 죄책감이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저지른 살인이었지만 죄책감을 떨칠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빌러비드는 그 죄책감을 이용해 세서를 옥죄기 시작한다. 마치 죄인의 죄를 잡고 협박하여 꼼짝없이 자기의 졸개로 부리는 불의한 인간처럼. 이때 작가는 마치 제삼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덴버를 이용해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끝을 맺게 만든다. 덴버에게는 도약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날 자기 아이를 죽였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빌러비드는 사라진다. 124번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찾아왔던 것처럼 124번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떠나 있었던 폴 디가 돌아오고 세서와의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빌러비드가 어떻게 환생한 아이일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한 얘기냐, 진짜 사람 맞냐, 환각 아니냐, 등의 질문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빌러비드가 실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폴 디는 의심 없이 진짜 사람이었지만 그가 진짜 사람이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토니 모리슨은 폴 디를 세서의 미래로, 빌러비드는 세서의 과거로 설정한 듯하다. 세서는 과거의 깊은 상처를 지우고 싶었다. 적어도 자녀에게 전달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빌러비드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에 묶인 채 죄책감에 쌓여 남은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대변한다. 반면,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은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고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여 새로운 현재를 살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빌러비드가 사라지고 세서가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으로 작품이 마무리되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세서를 끝까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마칠 수 있었다.
폴 디와 함께 하는 삶에도 자주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나 (빌러비드가 나타나)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겨냈다고 생각할 때 즈음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날도 종종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를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고 그 사건 때문에 가지게 된 분노와 원망, 죄책감 등에 사로잡혀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단 건강한 삶이라 믿는다. 우리 대부분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잊으려는 노력도 간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겨내는 방법은 잊는 노력도 포함할 테니까. 그러나 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과거의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나 우리를 습격할 테고,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망각이라는 효과적인 방법도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세서는 곧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 역시 저마다 다른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거에 묶일 것인지, 그 상처를 이겨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우린 선택해야 한다. 부디 모든 사람이 세서처럼 후자를 선택할 수 있길 바라본다. 해방과 자유는 과거를 잊는 행위가 아닌 이겨내는 행위에서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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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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