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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리고 중독
오르기 힘든 높은 산 정상에 간신히 올랐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성취감으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그 순간의 감격은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다. 의식을 뚫고 나온 무의식의 발로랄까, 껍질을 깨고 나온 내면 자아의 민낯이랄까. 그동안 살면서 거쳐왔던 모든 인생의 굴곡과 모든 인생의 역경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만들어내는, 억눌리고 배제되고 소외되고 외롭고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몸짓, 그 순수한 참회의 순간, 무아를 경험하고 참된 자아를 만나며, 초월적인 그 무엇인가와도 접촉을 하게 되는 순간.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과 해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표는 산을 내려온 다음이다. 과도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인해 흥분된 상태는 강렬하게 온몸에 각인되어 한동안은 깨어있든 깨어있지 않든 지속되기 마련이다. 천국을 경험하고 온 것 같다는 둥, 마치 인생의 최고점을 맛보고 온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일상생활 따위는 손에 잘 잡히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곤란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어떤 이들은 그 경험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다시 산을 오른다. 비로소 방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맛을 보고 싶어서, 그 맛을 봐야만 살아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일상을 죄짓듯 등지고 과감히 길을 나선다.
처음 떠날 때와는 다른 기분일 것이다. 답을 찾고 싶고 막힌 곳을 뚫고 싶어 도망가듯 떠났다는 점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두 번째의 떠남은 첫 번째의 그것과는 다른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중독이라는 강력한 힘 말이다.
중독. 작든 크든 인생에서 우리를 지루함에서 건져주어 잠시 해방감을 주었다가 다시 조금 새로울 뿐 또 다른 지루함에 빠뜨려 넣는 강력한 힘을 가진 주체. 내면 깊숙한 욕망과 맞물려 내는 시너지 효과는 어지간해선 그 어느 것도 이길 수 없다. 인생은 오로지 그것만이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독은 저마다 다양한 형태와 강도가 존재하겠지만,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수록, 특별할수록 그 힘은 막강해진다. 중독도 중독 나름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중독의 피라미드. 이는 학문의 경우, 어렵고 어려운 학문의 길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가 그럴 것이고, 앞서 예를 든 것처럼 레저의 경우, 극히 소수만이 성취할 수 있는, 이를테면 북한산 정상 정도가 아닌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았을 때가 그럴 것이며, 종교의 경우, 커다란 회심을 경험했거나 교회 말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다거나 했을 때가 그럴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욕망이 점점 불거져 나와 그 경험의 의미를 왜곡시켜 중독의 피라미드를 오르게 될 경우, 비로소 재앙이 시작된다. 아무리 깊은 깨달음도, 아무리 높은 산 정상을 오른 경험도, 아무리 진실된 회심과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그 경험 자체에 모든 의미를 두게 되면,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 경험의 순간보다는 그 경험 이후의 순간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 높은 산을 내려온 이후, 회심과 큰 은혜를 체험한 이후, 그 이후에 다시 만나는 일상. 방점은 돌아온 일상의 무게에 있다. 높은 곳의 경험은 낮은 곳의 일상에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복귀한 일상에서는 한동안 반동적인 힘 때문에 혹은 중독성 강한 힘 때문에 공허를 경험하기 쉽다. 이때가 바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시기다. 한 사람의 변화는 어떤 커다란 사건을 만난다 하더라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점진적 변화는 일상과의 화해에 있다. 어떻게 적정선을 찾아내고 유지할 수 있는지, 어떻게 조화롭게 양극단을 구부려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있는 것이다. 높은 산을 경험한 당신, 여전히 높은 산을 쫓는 인생, 그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 일상을 등지고 있진 않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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