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구약 읽기의 좋은 길잡이

김근주 저, ‘하나님 나라로 읽는 구약의 숲’을 읽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복음의 정수이자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이제는 많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의 고정관념은 그리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입에 담기에 천박하게 보이고 주위에서 욕 얻어먹을까 두려워 그 구호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뿐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그 구호가 말하는 것과 동일한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겉만 바뀌었을 뿐 속은 별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라는 말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단순히 구호로 전락한 말은 힘이 없을 수밖에 없고, 무책임하고 무분별하며 무식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인상마저 준다는 말이다. 어릴 적, 예수 이름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귀신이 다 떠나간다는 말을 나는 교회 어르신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어린 마음에 예수는 귀신보다 더 힘이 센 영적인 존재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깜깜한 곳에 갈 땐 앞뒤 표지가 까맣고 테두리가 붉게 칠해진 두툼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동생의 손을 잡고 떨면서 가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돌이켜보니 그건 믿음이 아니라 무속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예수 이름은 이교도나 무속 신앙에서 외우는 주문과 같은 의미에 불과했고, 성경책은 부적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예수의 존재는 가장 힘이 센 존재 정도로 막연하게 다가왔었다. 

그에 따라 구원이라는 의미도 자연스레 귀신들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안전지대, 즉 ‘천국으로 들어가는 행위’와 같이 뜬구름 잡는 의미로 다가왔었다. 가장 힘이 센 존재를 따르니 그 아래에 있는 약한 존재들은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뭔가 말이 되는 듯했다. 또한 천국은 저 구름 위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간으로써 죽으면 영혼만이 몸에서 분리되어 둥둥 떠서 가는 곳으로 설명이 되었다. 살아있을 땐 계속 귀신이 속임수로써 유혹하고 방해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가면 영원히 흰옷 입고 하프나 켜면서 예배하고 찬송하며 귀신으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설명되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지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예수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예수를 믿으면 죽기 전 인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벌어져야만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해선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도 일부러 안 가르쳐준 것일까, 아니면 몰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 이름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영접 기도 한 번 따라 하면 구원을 곧장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구원을 받게 되면 과거에 지은 죄는 물론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받았다고 (분명 완료형이었다!) 했다. 구원이란 죄를 용서받는 것이구나, 하고 막연하게 이해했었지만, 죄라는 게 또 무슨 의미인지, 용서받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때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확신이 없다고 하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모호한 기분이라도 확신이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주일학교를 같이 하던 아이들 중 확신이 없다고 말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뭐 만장일치도 아니고). 그렇게 내 어릴 적 교회 생활은 보이지 않는 무언의 종교적인 권위에 눌린 채 정확한 성경 지식 없이 다분히 무속적인 신앙으로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하셨던 고마운 분들의 마음이 떠올라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쉽고 슬프기까지 한 이 마음은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 결과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대학교에 가자마자 거의 1년 간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교회 오빠였고, 모든 목사님들과 중직자분들에게 포항공대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믿음과 실력을 겸비한 참 신앙인으로 칭찬을 듣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80-90년대에 한국에서 교회를 다녔던, 나와 비슷하거나 높은 연배의 분들은 아마도 위에 내가 적은 하소연에 적지 않은 공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때를 떠올리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서두가 길었다. 복음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관계에 대해 운을 떼다가 한참 옆길로 샌 것 같다. 그러나 지우진 않겠다. 단 몇 분만에 일필휘지로 쓴 하소연이지만, 뭔가 가슴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쓴 것이고, 이런 글은 남겨두고 나중에 읽게 되면 소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감상문에 집중해 보겠다.

저자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복음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정도로만 해석되는 이유 중 하나로 구약의 부재를 머리말에서 밝힌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구원받다’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구약을 통해서 풀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구원은 값싼 구원이 되어 버렸고, 천국행 티켓 정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약의 성취다.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말은 구약이 전하고 약속하고 선포한 것의 온전한 의미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을 이해해야 한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과 이적,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많은 말씀들과 행동들의 의미는 사복음서만 읽어서는 반의 반의 반도 이해할 수 없다. 구약에서 말하는 약속과 선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것들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이 어찌 이해가 되겠냐는 말이다. 구약은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필수 과정인 셈이다. 

그러나 위에 적은 나의 어릴 적 교회 생활에서도 잠시 엿볼 수 있지만, 80-90년대 한국 교회에서는 구약에 대한 설교와 공부가 평신도들에게는 거의 닫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저 예화 정도로 소개되거나 비기독교인들도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유명한 성경 속 인물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등)에 관련된 이야기들 정도에 그쳤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예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이 동원된 적은 없었다. 마치 구약과 예수의 복음은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분위기였다.

이 책은 쉽게 풀어쓴 구약 개론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신학에 문외한이더라도 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저 은혜를 끼치기 위한 설교 형식으로 써지지 않고, 학문적이면서도 객관적이고, 극보수에도 극진보에도 치우치지 않은 필체로 구약 성경을 이루는 모든 책의 핵심을 간결하게 짚어준다. 서른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하루에 한 장 정도씩 천천히 읽어나가면 좋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읽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구약에 있는 책들을 함께 읽어나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조직신학자가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교파나 교리에 의거하여 써지지 않았다는 점, 대신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해석되고 써졌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회권 목사님이 쓴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 오경’과 비교하면 분량은 물론 설명이 턱없이 짧을 수밖에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로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여 써졌기 때문에 구약을 제대로 읽어보길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겐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대장간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