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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신과 인간, 그 깊음에 대하여
엔도 슈사쿠 저, ‘깊은 강’을 읽고
이 작품의 저자 엔도 슈사쿠는 ‘침묵’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침묵’에서 말하고자 했던 침묵의 의미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독되었다. 작품 ‘침묵’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오래된 난제 중 하나인 신정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많은 독자들에게 침묵은 곧 ‘하나님의 침묵’으로써,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고통 앞에서도 선뜻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않으시고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로써 오해되었다. 아무리 작품이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고, 독자는 제2의 저자라고 하지만, 독자에게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반대로 해석된다면 그건 실로 난감한 상황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고자 ‘침묵’ 출간 26년 후인 1992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그 작품에 대한 해제로써 ‘침묵의 소리’라는 책을 펴낸다. 거기서 그는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언급한다. 작품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챕터라고 할 수 있는 ‘기리시단 (Christian의 일본어 음역)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에게는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본의 경우에는 아예 누락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챕터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믿음이 강한 (?) 자만이 아닌,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아 겉으로 보기엔 배교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위 믿음이 약한 (?) 자들의 신앙에 대한 저자 엔도 슈사쿠의 숨은 메시지가 드러난다.
후미에를 밟았던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했고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간교하고 교활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던져주었던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써 로드리고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챕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이 간직했던 (혹은 회복되었던)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그러므로 작품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의 의도는 ‘끝까지 침묵하시는 매정하고 야속한 하나님’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침묵의 소리’라는 표현의 의미였다.
엔도 슈사쿠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와는 달리 일본의 문화와 정신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일본인들이 (혹은 조금 더 넓게 본다면 동양인들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 (혹은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라면 ‘순전한 기독교’)의 정신 혹은 본질을 견지할 수 있는 기독교를 원했다. 이성, 논리, 합리에 천착한 교리 위주의 서양식 관점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일본인 엔도 슈사쿠가 보기엔 ‘몸에 맞지 않는 양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고민은 아마도 엔도의 평생 숙제였던 것 같다. 1923년생이었던 그는 1966년에 ‘침묵’을 출간하고,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94년에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던 이 작품 ‘깊은 강’에서도 그의 그러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엔 주요 인물 총 다섯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남남이며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인도 단체 여행을 계기로 우연히 모두 만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다섯 명이 모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부분적인 분신이라는 점이다. 엔도가 경험했던 과거의 편린들이 각 인물들의 과거 흔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 역시 그랬다. 함부로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 영향받고 지배받는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과거 이야기들. 살다 보면 어떤 예기치 못한 시공간이 불현듯 찾아와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그 이야기들을 꺼내놓게 될 때가 있다. 이들 역시 그랬다. ‘깊은 강’, 즉 인도에 위치한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 흐르는 갠지스 강 앞에서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깊은 이야기들이 불거진다. 그 순간은 곧 자기 내면의 정직한 모습을 대면하는 순간이었고,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없고 헤어릴 수 없는 그 무엇과 접촉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깊은 강’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인간의 깊음과 그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의 깊음과 대면하는 곳.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엔도 슈사쿠의 깊은 고민의 열매로 직결된다. 특히 다섯 명 중 오쓰의 삶의 모습, 그의 말과 믿음과 행동에서 엔도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오쓰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숙맥이라 오타쿠처럼 친구도 없고 홀로 진지한 철학, 신학적인 문제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삶과 죽음, 즉 인생의 문제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로 고민에 빠져 있다. 다섯 명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미쓰코는 주위 친구들에게 반쯤은 떠밀려 오쓰로 하여금 일탈을 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미쓰코에게 버림받게 된 오쓰는 그것을 계기로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미쓰코는 오쓰를 신으로부터 훔치고 싶어 했고, 잠깐 성공한 듯싶었으나, 오히려 결국엔 신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든 결과를 내고 만 것이었다.
미쓰코는 오쓰를 골려 주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남자들과 동침도 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며 일탈을 감행하면서도 늘 마음 한 편에서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미쓰코로 하여금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러서도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오쓰를 신혼여행 중 불쑥 찾아가게 만든다.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무언가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쓰코는 이혼하고 나서도 자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프랑스를 떠나 인도 바라나시에서 거주한다는 오쓰를 찾아 나선다.
오쓰는 프랑스까지 가서 신부가 되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논리, 이성,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철된 서양식 기독교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양심 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유일신 사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모든 것 안에도, 심지어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오쓰를 당연히 이단적인 사상으로 물든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고, 그 결과 그에게 신부 자격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쓰는 자신의 신앙관을 버리지 않고 신의 이름을 사랑과 동일하게 정의하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밖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류 교회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지만, 어쩌면 오쓰야말로 교회 안에서 엄숙하게 무게를 잡고 경건한 척하는 성직자들보다 예수를 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저자 엔도 슈사쿠는 오쓰의 이러한 모습에 자신을 신앙관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종착지이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농축된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한쪽에서는 성스러운 그 강에 온몸을 담그며 입을 헹구고 나와 브라만 승려에게 축복을 구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곳으로 죽으러 오는 많은 사람들의 시체나 화장된 재가 뿌려진다. 강에 둥둥 떠다니는 죽음과 새로운 생을 기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역설적인 장소가 바로 갠지스 강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의 제목 ‘깊은 강’의 의미도 곧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가장 깊은 곳,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칫 오쓰의 신앙관이 범신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한 것 같다. 저자는 오쓰로 하여금 직접 모든 것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으로 해석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이라는 의미인 반면, 범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므로 그 모든 것 안에는 신이 내재하며, 모든 것의 여집합도 신 안에 존재하므로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쓰의 여러 대사와 행동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입장은 범신론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범재신론적인 신앙관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서양식 기독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신론과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오쓰는 주류 교회 안으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 엔도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서양 기독교의 편협함을 넌지시 짚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의미는 범재신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걸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피조물 안에 거한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초월하시며 존재하신다는 생각. 과연 이런 생각이 정통 기독교에 반하는 것일까. 오쓰가 교회 안으로 수용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막연하게 ‘모든 것’ 혹은 ‘세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단지 타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 속에는 뚜렷한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봄직한 주제 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덧붙여, 한 가지 꼭 일러두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이 종교적인 색채만을 띠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을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필체로 쓰여있으며, 이런 필체는 소설 끝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써졌다고 봐야 한다. 신앙 서적도 신학 서적도 아닌 문학 서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가 어떻게 소설을 구성했는지, 어떻게 사건과 상황을 묘사하고, 어떻게 서사를 이어가는지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깊은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아닐까. 빨려 들어가는 소설, 생각을 깊게 해 볼 수 있는 소설이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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