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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글의 방향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 28. 12:49

글의 방향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소설이 나의 최종 목적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운명이랄까. 아직은 막연한 이끌림이지만, 그 힘은 강한 자력을 지니고 있어 매일같이 나를 끌어당긴다. 이제는 쓰고 있는 습작 소설의 내용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춰보고 다시 읽어보고 살을 붙여나간다. 재작년에 시작했던 일이니 햇수로 따진다면 벌써 3년째에 접어든 셈이다. 이제 겨우 A4지로 다섯 페이지 적었으니 효율을 말하자면 정말이지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십 년을 써도 스무 페이지밖에 못 쓰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다섯 페이지가 그냥 다섯 페이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한때는 열 페이지가 넘었다가 다시 한 페이지로 줄었고, 이런 식의 셀 수 없는 반복 끝에 현재 다섯 페이지에 와 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다섯 페이지밖에 못 쓴 게 아니라 오늘이라는 한 점이 나타내는 순간 기울기 값이 다섯 페이지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썼던 글을 다 합치면 몇십 페이지는 거뜬히 넘길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런 지난한 작업에 마음을 뺏기는 걸까. 왜 나는 직업과도 별 상관이 없고, 그렇다고 돈도 되지 않을뿐더러 경험도 전무한 소설이라는 분야를 마음에 두는 걸까. 이런저런 내 과거를 들먹이며 설명을 시도해보아도 모두 해석일 뿐 진실은 나조차도 모른다. 나는 그저 쓸 뿐이다. 이런 걸 운명이라는 단어 말고 더 적당하게 표현할 방법이 또 있을까. (여기서 운명, 사주, 팔자 뭐 이런 개념 들먹이며 운명론자냐 하나님 안 믿냐 하면서 함부로 재단하지 마시길 제발).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진도가 조금씩 나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흰 도화지였던 글에 이제 뼈대가 조금씩 세워지고 있다.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 거기에 들어갈 철학적인 (혹은 신학적일 수도 있는) 물음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현대 웹소설처럼 가볍지도 않고, 고전소설처럼 너무 무겁지도 않게 적당히 조율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는 문장들까지 하나씩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소설은 모든 걸 다 짜 놓고 그 계획대로 써나가는 게 아니라 어떤 인물이나 상황으로 시작해서 그것들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면 대화를 하면서 써나가는 거라고. 그 말이 그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최근 들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그저 글이 엔터테인 할 수 있으면 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제한된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대에 읽히고 묻히는 소설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의 끈을 아직은 놓고 싶지 않다. 내가 이상적이거나 무지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한 번 뚜벅뚜벅 걸어가 보련다. 바라는 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 만큼 아는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런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소망은 굳이 버리고 싶지 않다. 언제 완성될지 아무도 모르는 이 소설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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