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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 29. 07:33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주로 명제적 진술로 이루어지는 논픽션과는 달리 픽션인 소설을 읽는 이유는 정보 수집이 아니다. 누군가는 재미 삼아, 누군가는 도피처 삼아, 또 누군가는 특정한 이유 없이 소설을 읽는다. 논픽션에 해당되는 글쓰기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원인 관계가 명확해야 하며 근거와 주장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잘 써진 논픽션은 한 편의 훌륭한 강연을 듣는 효과를 낸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허를 찌르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고 확실한 논리 전개와 증명과정은 읽는 이에게 쾌감과 전율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명제적 진술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간결하고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반하여 소설은 전혀 다른 글쓰기로 이루어진다.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어떤 정보를 알려주거나 글쓴이의 정리된 생각이나 주장을 담은 직접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대신 간접적으로 그 생각이나 주장을 독자들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인물이나 상황 등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구성된다. 이를테면, “방 안이 몹시 건조하다”라고 쓰는 게 아니라 “흥건히 젖었던 수건이 한 시간 만에 바짝 말랐다”라고 쓰는 게 소설의 글쓰기인 것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글쓰기 방식이다.


소설의 글쓰기가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직인 방식이 아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낸다. 논픽션의 명제적 진술은 저자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독자는 그 글을 아무래도 수동적으로 읽게 된다. 이어지는 해석은 이차적이다. 그러나 소설의 글쓰기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의 개입이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방이 건조하다는 문장 대신 수건이 바짝 말랐다는 문장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 문장을 읽지 않고 보게 된다. 두 문장 모두 건조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소설의 글쓰기는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저자와 독자의 협업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빨려 들어가며 읽을 수 있지만, 논픽션은 어지간해선 그런 몰입이 힘든 것도 이 때문이고, 독자의 수동적인 자세를 야기하는 논픽션 글쓰기가 독자들을 빈번하게 잠재우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 한 가지가 있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소설의 글쓰기가 자칫 논픽션의 명제적 글쓰기보다 철학, 인문학 등의 깊은 사유를 거친 사상을 연구하는 과정 없이도 단지 글재주만으로 (혹은 수려한 문장들만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기발함과 흡입력 있는 이야기 전개만으로 소설을 쓸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도 한국에서 출간되는 대부분의 소설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존재 자체도 알리지 못하고 사라지는 소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설사 반짝 빛나는 기회를 맞이한다 해도 곧 사그라들고 말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래 읽히고 또 읽힐 수 있는 소설은 그러한 기발함과 재미 위주의 글쓰기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고전 문학을 나름 꽤 많이 지속해서 읽어나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나는 바로 여기에 현대 소설과 고전 소설의 차이 (혹은 베스트셀러 현대 소설과 스테디셀러 고전 소설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논픽션 작가와 비슷한, 혹은 어쩌면 더 깊은 사유와 질문들을 거친 이후에 소설만이 가진 특유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써 내려가는 글. 나는 이런 소설은 지금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갈수록 소설의 이미지가 시간 때우기 정도로 되어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크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가치 때문이리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소설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소설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단 한 편을 쓰더라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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