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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
머리는 몸보다 빨리 기억한다. 하지만 머리는 몸보다 빨리 망각하기도 한다. 속도는 느려도 몸은 한번 기억한 것은 오래 간직한다. 머리는 망각해도 몸은 기억한다.
몸은 행동한다. 길들이기는 어렵지만 한번 길들이면 효과가 오래간다. 몸은 좀처럼 망각하지 않는다. 몸은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머리가 망각한 일을 몸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때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런 순간이 닥치면 머리는 몸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마음대로 행동한 게 아니다. 몸은 머리와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망각하지 않고, 기억한 대로, 길들여진대로 행동할 뿐이다.
머리는 뒤늦게 몸의 반복된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망각의 강에 아직 잠기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리곤 마침내 기억해낸다. 첫 방문인 것 같은 재방문. 낯설고도 익숙한, 기억의 재방문이다.
전율이 인다. 소름이 돋는다. 때론 눈물이 터진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친다.
이내 모든 게 기억이 난다. 조그만 기억의 창을 통해 파묻혔던 거대한 세상에 발을 디딘 것처럼, 의식 저변에 깔려있던 오래 묵은 기억의 다발을 끄집어낸다. 시간은 멈추고, 과거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
다 몸 덕분이다. 생각하지 않고 망각하지 않는 몸의 행동.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몸의 행동. 뇌의 자정 작용도 건드리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
아무래도 사랑은 머리가 아닌 몸의 일인가 보다. 그래서 오래 참아야 하나 보다. 참고 견디는 과정이 사랑을 성숙하게 한다.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성실한 움직임. 느리지만 오래가는 무언의 움직임. 오랜 기간 축적된 성실한 행동 없이 어찌 사랑을 증명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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