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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공적 지향성
무언가를 알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 많아진다.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면 복잡해진다. 정리가 필요해진다. 기존에 알던 것과 새로 알게 된 것들 사이의 충돌을 조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지경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건 지경을 넓히는 발전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늘 긍정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한 가지 이유는 변증법적인 과정 중엔 정과 반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새로 알게 된 것으로 기존에 알던 것을 덮어써야 하는 경우, 아니 덮어쓸 수밖에 없는 경우에 봉착하게 될 때 우리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된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양자 도약하는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한 편으론 차라리 몰랐다면 행복했을 거라는 미련이 진하게 묻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지 못했을 때의 순진함 자체는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우물 안이 아닌 우물 밖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 안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악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정과 반을 모두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타자에게 강요하고 마치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물 밖으로 나 있는 문을 닫아 사람들을 가둬 버리는 행위는 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쇄국정책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번도 긍정적인 열매를 맺은 적이 없다. 자기 딴에는 그렇게 문을 막는 것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을지 몰라도, 그건 사람들의 알 권리, 즉 자유와 발전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결과를 낳는다. 그 선택의 기로가 그 사람에겐 일생일대의 혼란이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임에 틀림이 없다. 다양한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타자를 존중하지도 못하는 인간이 타자를 지키고 보호할 수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진보나 보수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경솔한 행위이지만 (왜냐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 자체도 어느 쪽인가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나 두 집단을 놓고 상대적인 비교를 했을 땐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진다. 이때의 우물 안은 보수에 해당되고 우물 밖은 진보에 해당될 것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건널 수 없는 강이라 표현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당사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많이 보인다고 해서, 지경이 넓어졌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많이 볼 수 있게 된 나는, 지경이 넓어진 나는 대혼란을 겪을 수도 있고 인생의 변곡점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공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의 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아는 것과 보는 것, 즉 지경이 넓어지는 것의 방점은 나에게 있지 않고 타자에게 있는 것이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해서 건방 떠는 사람들, 남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우월함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모두 넓어진 지경을 사적인 영역에서만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방향은 지금도 끊임없이 지경을 넓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좋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나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만큼 타자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키다.
한때 나는 우물 밖으로 나와서 우물 안에 갇혀 있던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도 했고,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과 우물 자체를 혐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우물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부족한 것들이 많았으며 그들에게도 행복은 없었다. 오히려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보인 적도 많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내가 나 스스로만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젠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우물 밖을 경험한 나는 우물 안의 사람들과 우물 밖의 사람들 모두를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여전히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고통스러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지경이 넓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나만 생각했을 땐 무가치하다고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타자를 고려했을 땐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착할 수는 있어도 공감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고, 우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착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공감력은 충분히 좋을 수 있다. 단, 앎의 공적 지향성을 인지한다면 말이다.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나는 착한 사람과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가늠하게 된다. 앎은 앞으로도 지향할 것이다. 개인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질지 몰라도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을 향하는 삶으로의 좋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앎으로 인해 지경이 넓어지는 건 기쁜 일이다. 이제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시작점에 선 것 같은 기분이다. 공감과 이해 없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던 지난날들이 참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진정한 사랑은 우물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증명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함께 함 가운데 그것은 증명된다. 그러기 위해선 앎의 공적 지향성을 숙지하는 건 필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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