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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2차 세계대전’ 하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단어는 반지성적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그들에 의해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 이른바 ‘홀로 코스트’이다. 악의 발현, 아니 악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닌, 그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희생당한 유대인들이 왜 나에겐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했고, 엄청난 수가 도살되듯 강제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피의 심연이다. 또한, 그곳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유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자는 이를 ‘운이 좋아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이 책의 첫 문장 첫 단어로 등장한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의 귀중한 수기인 셈이다. 허구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역사책으로 배우는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적 존재와 기능을 거뜬히 넘어서 우린 죽음의 집, 비인간화의 집, 즉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의 절제된 필체는 애써 참았던 울분과 끝이 보이지 않는 허망함과 먹먹함에 끝내 불을 지르고야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깊은 절망이 덤덤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 느껴지는 초탈함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문자화 되면서 감정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겐 그 끔찍한 실상을 무신경한 것처럼 써 내려간 부분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감옥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지만, 그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억울한 이유로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감옥은 어디까지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감옥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새 터전이다. 그러나 수용소는 범죄자이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철저히 그 수용소를 짓고 사람들을 가두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는 인간 말종들의 적이라면 누구나 (특히 유대인들) 강제로 수용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고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장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산둥 수용소’의 저자이자 저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였던 랭던 길키도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거주할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로 보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산둥 수용소’ 작품 역시 그의 수용소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기인 셈이다. 그 작품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책의 부제가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기인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와 비교하면 그 타격이 약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철학과 신학에 기반한 엘리트 학자의 눈에 비친 수용소 사람들에 대한 분석이 위주가 되었다는 건 저자 랭던 길키에게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이 남아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경험은 보다 직설적이고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책의 제목이 ‘이것이 인간인가’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훨씬 더 깊고 인간의 중심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건드리며 독자 눈과 마음을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이 어떤 좁은 장소에 밀집되고 격리되었을 때, 그래서 장기간 외부와 차단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하던 의식주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이 어떤 존재로 바뀔 수 있는지는 실화를 기반한 위의 세 작품 말고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100% 허구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그 민낯을 생생하게 까발린 역할은 위의 세 작품과 비슷한 정도로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 프리모 레비의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실화이며, 운 좋게 죽다 살아남은 자의 생생한 수기이며, 무엇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의 잔인함이 극대화된 장소로부터의 회고록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비록 살아남아 이 책을 쓰고 40년에 걸쳐 증언을 해왔지만, 그의 불안과 절망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1919년생인 그가 68세가 되던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위에 언급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그 어떤 책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살아남은 자의 자살. 한참 생각에 잠겼던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말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비단 히틀러와 나치 세력들만을 향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살을 선택했던 이유. 비인간화의 극치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냈던 생존자가 최후로 선택한 행동이 스스로 소중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니! 그리고 나는 히틀러와 나치를 넘어 프리모 레비까지 포함하여, 오늘 접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 큰 범주에서 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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