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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문학과 비문학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3. 18. 08:30

문학과 비문학

문학과 비문학을 병행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 영역에서 내가 주로 소화해 나가는 건 소설이고 가끔 에세이를 읽는다. 비문학 영역에서는 신학, 인문학, 철학 서적을 읽는다. 뒤늦게 독서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처음엔 두 읽기를 일대일 비율로 균형 있게 읽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읽어나가는 속도 차이다. 어지간한 소설은 그것이 가진 서사에 의해, 혹은 작가의 문체에 매료되어 완독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비문학 서적들은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루에 한 페이지조차 읽어내지 못할 때도 부지기수다. 문학과 비문학 읽기에 동일한 시간을 배분한다 하더라도 완독 하는 정도는 물리적으로 현저하게 차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두 읽기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경계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중력이 작용하여 하나의 읽기를 하다 보면 나머지 하나의 읽기는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다. 점점 틈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을 여러 권 연이어 읽다 보면, 이론상으론 소설이 지겨워 비문학 읽기를 시도하게 될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론 그다음으로 손에 드는 책도 소설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나는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을 꽤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그들 중 이 괴상한 중력 법칙에서 비껴가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재미있게도 문학 읽기에 치중하는 부류와 비문학 읽기에 치중하는 부류로 자연스레 나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읽기를 병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저절로 되진 않는 일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준히 둘을 병행하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실천을 해오고 있다. 비록 일대일 비율은 아니지만, 삼대일 혹은 사대일 정도의 비율로 비문학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스스로 이 방법이 내는 효과가 긍정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노력의 중요성을 이 글에서 짚어보려고 한다. 

먼저 고백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나는 비문학 읽기만 주야장천 해오던 아주 전형적인 과학자였다는 점이다. 이삼십 대 시절 대부분 나는 문학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공지향적 가치관에 휘둘리어 피의 피라미드를 하루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라 소설이나 시를 읽는다는 건 정신 나간 행동 혹은 사치스러운 행동 정도로 여겼던 듯하다. 대신 나는 허구한 날 논문과 그와 관련된 서적만을 탐독했다.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여 그 무엇이 얼마나 더 가치를 지니게 되는지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비문학보다 문학 읽기를 더 좋아하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위에서 언급한 중력 법칙에 따라 비문학은 전혀 읽지 않게 될까 두려워하는 내 모습도 자주 발견할 때가 많을 정도이니, 인생 참 모를 일이고 정말 살아봐야 아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이런 현재를 단 한 번도 기대하거나 예상해본 적이 없다. 인생이 언제나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이 현상은 오히려 내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참고로, 나에겐 이 변화의 과정이 내 인생의 가장 낮은 점을 통과하고 회복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리고 쓰기가 습관화되어 몸에 익숙해지는 과정과도 맞물린다. 그렇다면 이 현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진 나도 잘 모르겠다.)

먼저 비문학과 문학을 비교해보는 게 필요할 듯하다. 비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분야는 논문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읽을 때엔 하루에 두세 편씩 읽어대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어떤 기술을 연마할 때를 떠올려보자. 초기에는 어디에 힘을 줘야 할지 몰라 혹은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여 몸이 쿡쿡 쑤시는 등 여러 가지로 힘들고 포기할까 망설여질 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게 되면 익숙해지고 요령도 늘게 되어 자연스레 힘을 뺄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말하자면, 베테랑이 되는 것이다. 논문 읽기도 마찬가지다. 수십 편, 아니 수백 편을 읽다 보면 요령이 생기게 되어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를 그냥 지나쳐도 되는지를 알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닌 저자로서도 읽게 되기 때문에 한 논문을 완전히 해부하면서 읽을 수 있는 단계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단계에 이르게 되면,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다. 먼저 좋은 점은 베테랑으로서 그리 공을 들이지 않아도 핵심을 파악할 수 있으며 나름 자신의 그 능력을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나쁜 점 역시 좋은 점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즐기기만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숙련된 자들이 빠지기 쉬운 어두운 면, 바로 ‘정체기’라는 시기를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정체기에 접어들면 이미 단련된 근육으로 어지간한 것들은 다 해결이 되기 때문에 새로운 근육을 만드려고 애쓰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상태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미 가진 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알다시피 근육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마음은 여전히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몸은 점점 더 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되어 스스로 괴리에 빠지게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로서 나는 이런 소위 전문가들을 많이 만나왔다. 그동안 해온 것들로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능력도 좋고 솜씨도 좋으나 겸손하게 배울 자세는 온데간데없고 자기가 그 분야의 최고라도 되는 듯 권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으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문학 읽기를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전문가나 매너리즘을 얘기하면서 삼천포로 빠지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삼천포로 빠진 게 아니다. 비문학 읽기에도 동일한 맥락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비문학 읽기만을 읽기의 전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문학 읽기에 시간을 투자해야 할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한다. 경솔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소설 읽기가 어렵다는 둥 이런저런 완곡한 표현을 동원하여 핑계를 대지만 한 마디로 핵심을 말하자면 어려운 게 아니라 읽기 싫고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봤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소설은 자기가 젊었을 때 많이 읽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문학은 어른으로 성숙하기 이전에 읽는 것이고 비문학이야말로 성숙한 정신이 읽는 것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지만, 속으로는 항상 되묻곤 한다. “그럼 비문학에서 문학으로 건너온 나는 성숙에서 미성숙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라고. 

그렇다. 비문학 읽기에 치중한 사람들의 속마음엔 문학 읽기를 가볍게 여기는 생각이 숨어있는 것 같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옳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문학과 비문학을 성숙함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고 말이다. 문학은 어린애들이 읽는 거고 비문학이 어른이 읽는 거라도 되는 듯한 그 고고한 자세를 제발 삼가 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인식론적 폭력일지도 모르니까.

반면, 문학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은 비문학 읽기를 주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들이 더 성숙하다거나 우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내가 위에서 언급한 매너리즘에서 찾는다.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을 보고 소설 전문가라고 말하진 않는다. 대신 신학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많이 읽는 사람을 보고는 전문가라는 호칭을 부여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놀랍게도 이미 비문학이 문학보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우월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비문학 읽기를 많이 하다 보면 베테랑이 될 수 있다. 비문학은 아무래도 재미라든지 여가라든지 하는 단어보다는 효용성 혹은 유용성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재미와 여가의 베테랑은 문학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효용성과 유용성의 베테랑은 실질적인 표현이다. 즉 비문학 읽기에 치중한 사람들은 지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름대로 베테랑으로 불릴 수 있는 단계에 다다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기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예전보다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인 일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몸은 생리적으로 퇴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되겠다. 

이에 반하여 소설은 읽어도 읽어도 베테랑이 될 수 없다.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질 수는 있겠지만, 저마다 다른 서사와 묘사와 문체와 메시지를 가지기 때문에 어떤 한 소설을 다 읽었다고 해서 다른 소설을 쉽게 읽어낼 수는 없다. 베테랑이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매너리즘의 반대말을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명제적 진술로 무언가를 주장하고 증명하는 식의 글쓰기에는 상상력이 깃들기 어렵다. 사이다 같은 통쾌한 글쓰기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글쓰기로 전문가로서 대우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비문학 글쓰기에는 아무래도 문학 글쓰기보다 상상력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허구라는 놀랍고도 큰 세계를 어쩌다가 문학적인 비유를 드는 경우를 제외하곤 일체 배제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만 천착한 글쓰기가 외치는 대상은 아무래도 몸 전체라기보다는 머리에 국한된다. 때론 가슴을 울리는 글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건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난 다음에나 맞이할 수 있는 이차적인 기회일 뿐이다. 

상상력은 문학의 핵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상력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지껄일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수록 상상력이 더 중요하지 않냐고.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올라가 매너리즘에 빠진 베테랑으로서 갑질이나 하며 자기 자신만 잘 살면 되는 거냐고. 허구한 날 자잘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세월을 탕진할 작정이냐고.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 서적 읽기로 뒤늦은 독서 여정을 출발했었다. 그러다가 문학 서적 쪽으로 방향을 많이 틀었다. 놀랍게도 나는 루이스나 라이트 등 여러 기독교 저술가 (루이스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쓴 책에서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깊고 풍성하게 묵상할 수 있었으며, 여러 철학자들의 일차 이차 자료를 읽을 때보다 고전과 현대 소설을 아우르는 여러 소설을 읽을 때 인간의 본성에 관계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소설을 읽으며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을 함께 아우르며 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비문학은 평면적이고 문학은 입체적이라 생각한다. 주장과 증명이 평면적이라면 상상력은 입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문학은 문학을 아우를 수 없지만, 문학은 비문학을 넉넉히 안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여전히 애를 쓰면서까지 비문학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읽으려고 하는가? 쉽게 말하자면 균형이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알맹이 없는 겉도는 답에 불과하다. 나는 두 읽기가 병행될 때에만 두 읽기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너지로 인하여 두 읽기 모두 더욱 깊고 풍성하게 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걸 체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안에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이 들어 있다 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즉,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비문학 읽기로 내공을 다지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게 문학 읽기에만 치중하면 안 되는 이유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나름대로의 해석과 함께 통찰력이 생기게 된 이유 역시 비문학 읽기로 보낸 숱한 시간들이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과거에 국한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지속적으로 두 읽기를 병행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주저 없이 권하고 싶다. 문학을 정말 좋아한다면 비문학 읽기를 병행하라고. 반대로, 비문학 읽기를 더 깊게 하고 싶다면 문학 읽기를 병행하라고. 두 읽기 사이의 시너지를 직접 맛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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