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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문장력과 필력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3. 17. 05:13

문장력과 필력

글 잘 쓰는 사람 칭찬할 때 쓰이는 표현 중에 ‘문장력이 좋다’ 혹은 ‘필력이 좋다’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문장력과 필력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정의부터 알아보자. 필력은 말 그대로 ‘글을 쓰는 능력’이다. 그래서 필력이 좋다는 말은 글을 쓰는 능력이 좋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장력은 ‘문장을 쓰는 능력’이다. 그래서 문장력이 좋다는 말은 문장을 쓰는 능력이 좋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문장과 글이 같은 것이냐고. 

문장과 글은 당연히 다르다. 문장은 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글이라 함은 문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문장이나 써대고 모아둔다고 해서 그것이 글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글은 문장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건 단지 구조적인 면에서만 그렇다. 알다시피 글은 생명이 없는 기계 덩어리가 아니다. 강철과 볼트와 너트 등을 마구 이어 붙인다고 해서 로봇이 만들어지지 않듯이 문장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다고 해서 글이 되지 않는다. 음식을 비유로 들어도 마찬가지다. 고기, 양파, 파, 당근 등을 마구 섞어놓는다고 해서 음식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설계와 실행이다. 로봇을 만들 때에도, 음식을 요리할 때에도 재료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요소는 바로 그것들을 만들기 위한 설계와 그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행능력이다. 설계가 탄탄하게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재료들이 유용성을 띠게 되고, 실제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실행에 옮기는 사람의 솜씨가 좋아야 비로소 훌륭한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재료 자체의 질과 그것들이 이어지거나 섞여서 만들어지는 최종 결과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먼저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이루는 금속인 비브라늄이 창고에 넘쳐난다고 해서, 혹은 일등급 장인들이 만들어낸 볼트와 너트 등이 진열장에서 영롱한 빛을 내며 대기하고 있다고 해서, 혹은 투쁠 등급 한우나 유기농으로 키운 채소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과연 멋진 로봇이나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로봇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사람의 설계와 실행능력, 즉 솜씨다. 아무리 훌륭한 재료들이 준비된다 하더라도 생각과 손의 공교함을 겸비한 창작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것들은 무용하다. 다시 말해, 재료는 그 자체의 질보다는 그것의 유용성, 즉 그것이 어떻게 쓰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미 검증된 로봇 만드는 사람이나 검증된 요리사들은 질 좋은 재료가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증된” 창작자라는 전제조건이 붙을 때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로봇과 음식,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글이라는 게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글은 최종 결과물이고 문장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장력이 좋다는 말은 질 좋은 재료를 준비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필력이 좋다는 말은 질 좋은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말과 같다. 

여기까지 오면 문득 궁금해진다. 좋은 문장과 좋은 글이라고 할 때 과연 ‘좋다’의 뜻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좋은 문장은 보통 아름다운 문장이나 명언 같이 함축적이고 강한 인상을 남기는 문장을 일컫는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좋은 글에 대해선 이미 예전에 내가 쓴 글이 있다. 요컨대 아름다운 문장만으로는 결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없다. 아름다운 글은 아름답지 못한 문장들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다시 말해, 좋은 글은 좋지 못한 문장들로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다시 음식 얘기로 돌아가 보자. 신선한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최고의 요리가 탄생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고의 요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요리사의 설계와 솜씨다. 이를 글에 적용하면, 글의 구상 (이는 작가의 문학적, 철학적, 인문학적, 과학적 배경지식과 경험이 좌우한다), 서사와 묘사 정도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서사와 묘사는 모두 문장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때의 문장은 아름답기만 한 문장이 아니라, 신형철의 말마따나 ‘정확한’ 문장에 가깝다. 그 흐름에 꼭 필요한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들. 군더더기 없이 해야 할 말을 하게 되는 간결한 문장들. 그러나 정확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좋은 글들도 많다. 작가의 문체랄까 스타일이랄까 고유의 개성이랄까 하는 요소가 충분히 매력적인 경우에는 문장의 정확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있다. 문체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볼 계획이다.

글쓰기 초보자에게서 흔하게 발견되곤 하는 현상 중 하나는 단어와 문장에 필요 이상의 힘을 준다는 것이다. 마치 아름다운 문장만 쓰면 곧바로 아름다운 글이 써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글쓰기 초보 시절에는 누구나 이런 허황된 믿음에 빠지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 그 자체는 나무랄 일이 못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름다운 글은 아름다운 문장만으로 쓸 수 없다. 자연스러움은 힘을 줄 때가 아닌 힘을 뺄 때 나오게 되는 법이다. 힘을 뺄 줄 안다는 것은 초보자가 아닌 숙련자만의 힘이다. 글쓰기로 몸이 단련된 작가만이 낼 수 있는 힘이다 (글쓰기를 위한 몸만들기에 대해서도 따로 글을 쓸까 한다). 

힘을 뺀다는 건 단어나 문장과 같은 한 그루의 나무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그 단어와 문장이 이루는 전체 숲을 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 전체 숲이 곧 글이기 때문이다. 멋진 로봇,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면,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단 그 재료들을 어떻게 잇고 섞을지, 어떡하면 그 재료들이 튀지 않고 조화롭게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에 일조를 하게 만들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나는 조언하고 싶다. 문장력이 좋은 작가에 머무르지 말고 필력이 좋은 작가로 진화하기를 바란다. 좋은 문장 제조기 정도에 머무르지 말고 좋은 글을 쓰고 노래하는 작가로 발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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