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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서사와 묘사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3. 16. 03:00

서사와 묘사

서사가 강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묘사가 강한 소설이 있다. 한국 현대 작가 중엔 정유정이 전자에 해당하고, 한강이 후자에 해당한다.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는 건 흥미롭다.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후자의 작품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묘사의 미학은 어떤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꼭 필요한 속성이라는 생각도 한다.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진이, 지니’를 빼고는 출간 직후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정유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은 ‘압도적인 서사’ 혹은 ‘휘몰아치는 이야기 전개’이다. 그만큼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고 끝장을 보고 만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녀의 데뷔작을 제외한 네 작품,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완전한 행복’의 공통점은 공교롭게도 ‘악’이다. 악의 존재와 실체를 논하는 건 형이상학적인 문제이지만, 악인을 논하는 건 그 실체가 분명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게 되므로 언제나 실질적이다. 악이 아닌 악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경험과 실제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네 작품 속엔 각각 대표적인 악인이 존재한다. 사회적 지위와 부로부터 오는 힘, 억눌린 감정의 잘못된 표출, 사이코패스, 도를 넘어서는 자기애 등 악인의 기원과 형성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공통적인 짓거리는 폭력과 살인이다. 악은 사람을 숙주로 삼아 발현하고, 그 발현은 궁극적으로 폭력과 살인으로 치닫게 된다는 일련의 내러티브. 이 내러티브를 압도적인 서사를 이용하여 숨이 차오르도록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가 바로 정유정인 것이다. 

폭풍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어 그것에 몸을 맡기다 보면 저절로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는 작품. 정유정의 네 작품은 모두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비슷한 분량의 다른 장편소설에 비교해서 짧은 편이다. 많은 경우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지 않아도 책장이 국수를 먹듯 후루룩 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흡입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어 자신이 책을 읽고 있는지 책이 자신을 읽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무아의 상태로 책의 끝까지 진행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정유정의 힘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흡입력이 강한 작품은 지나고 나면 어떻게 기억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빨려 들어가며 읽었던 작품이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니.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몰입하여 본 영화 중 과연 몇 개나 내 기억에 오랜 흔적을 남겼을까 생각해 보면 금세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와 일상의 차이랄까. 그렇다. 정유정의 작품은 스펙터클한 영화 같은 이미지로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막상 영화를 관람할 때엔 엉덩이에 힘을 주고 잔뜩 긴장하여 온 정신이 팔려 재미있게 보지만, 다 보고 나서는 그걸로 끝인 영화 같다고나 할까. 너무 영화 같은 이야기가 주는 양면이 아닌가 싶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말초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게 정유정의 작품은 가볍게 느껴진다. 

어떤 작품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건 그만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영화와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장면들과 무대 뒤나 아래의 장면들. 빛나는 순간들과 빛나지 않는 (그러나 잔잔한 빛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순간들. 이른바 영화와 일상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누구에게나 인생의 무게는 영화적 삶이 아닌 일상적 삶에 좌우된다. 일상은 영화보다 무겁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일까. 정유정의 작품이 가볍게 느껴진 까닭은 일상적 삶보다는 영화적인 삶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정유정의 작품을 읽는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구경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이 말이다. 마음을 담아 ‘읽지’ 않는 글은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 무게가 없어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한강 작가의 작품은 무겁다. 그래서 읽고 나면 흔적이 남는다. 어떤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겐 한강 작가가 맨 부커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 보다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가 더 인상적이었다. 내가 아는 지인 중 몇몇은 이 작품이 가진 무게 혹은 포스에 눌려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선 멘털이 조금 강한 나는 끝까지 읽어냈지만, 읽는 도중 자주 책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압도적인 그 무언가 때문에 말이다. 그 무언가는 아마도 한강 작가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글의 논리에 따르면, 압도적인 묘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유정의 작품과 한강의 작품은 둘 다 압도적이다. 그러나 다르게 압도적이다. 어쩌면 정반대의 느낌으로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정유정의 압도적인 서사는 책장을 빨리 넘기게 만들고, 한강의 압도적인 묘사는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만든다. 숨이 찬 상황과 숨이 멎는 상황의 대비랄까.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이 세 작품의 키워드는 모두 폭력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한강이 이 작품들에서 다루는 폭력은 정유정이 다루는 폭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먼저, 정유정이 다루는 폭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개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악인이라 할 수 있는 그 개인이 형성되기까지는 물론 사회구조적인 무언가가 작용했겠지만, 위에 언급한 그녀의 네 작품에서는 적어도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 마치 그 개인만 제거되면 모두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정유정의 작품을 읽으면서 섬뜩한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작품 속 악인이 우리 주위에도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혹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갖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즉, 정유정이 다루는 폭력, 그리고 악은 다분히 사적인 영역에서 다뤄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한강이 다루는 폭력은 사적인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한 개인이기보다는 한 집단이나 한 국가를 통해 발현된 악, 그 악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불거져 나온 폭력과 살인이 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간보다는 다수의 인간으로 독자의 시선을 몰고 가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에 다다르게 만든다. 말하자면, 한강이 다루는 폭력은 정유정이 다루는 폭력보다 크고 무거우며, 그래서 개별적이기보다는 좀 더 보편적이다. 

보편적이라 함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삶, 즉 영화적 삶과 일상적 삶 중 후자에 해당되는 속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유정이 다루는 폭력은 영화적인 뉘앙스가 강하고, 한강이 다루는 폭력은 일상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그래서 정유정의 작품을 읽고 나면 타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특정한 개인에 대한 공포나 혐오가 잠재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있고, 한강의 작품을 읽고 나면 폭력과 악이 작동하는 보편적인 기작을 보게 되는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게 되고 나 자신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로 인해 입을 다물게 된다. 

악의 존재와 실체는 그 누구도 딱 잘라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모습은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이다. 정유정과 한강, 이 두 작가의 작품 비교만 해도 폭력과 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이르는 사유를 깊고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서사와 묘사로 시작했던 이 글이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될지는 몰랐다. 뒤늦게 시작한 독서 여정에서 수백 권의 책을 읽었다. 그중 감상문으로 남긴 책은 230권이 넘는다. 감상문들은 모두 #김영웅의책과일상 이라는 해쉬태그를 달고 있고, 페북과 블로그, 그리고 브런치에서 만날 수 있다. 감상문은 앞으로도 적어나가겠지만, 앞으로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비교하는 글도 적어볼 생각이다. 이 몸 글처럼 말이다. ‘내 멋대로 서평가’만이 아닌 ‘내 멋대로 평론가’로서의 역량도 조금씩 갖출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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