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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헤세

헤르만 헤세 저,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를 읽고

헤세의 작품에는 유독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작품 주인공이 예술가인 경우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헤세 자신이 예술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는 헤세가 쓴 음악에 관련된 글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엮은 책이다. 그가 쓴 소설의 일부분이 소개되기도 하고, 그의 에세이, 시, 편지, 서평, 메모 등의 짧은 글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 관련해서도 이런 책이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그림 위에 쓰다’ 정도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의 여러 작품을 훑어보며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나가도록 하겠다. 음악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예술로 범위를 확장할 때 헤세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조용히 외쳤던 합일 사상을 더욱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고 단순히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식으로만 결론을 낸다면, 그건 아마도 곁다리만 짚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한다. 헤세는 작가이지 음악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되겠다. 음악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주제는 헤세의 철학 내지는 사상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도 수차례 언급되지만, 그것은 바로 ‘합일’이다. 두 개 이상의 대립된 자아나 성향을 보여주고 그 둘 사이에서 택일하여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닌,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 즉 합일 사상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헤세를 이해하는 게 이 책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다. 그는 두 자아, 즉 ‘늑대’와 ‘시민’ 사이에서 고뇌하는데, 어느 날 꿈에 고전 음악의 대가 모차르트가 나타나 계시와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서로 반대되는 두 자아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 즉 합일을 이루는 자아가 모든 고뇌의 해결책이라는 메시지였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가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로서 정신적인 사람을 대표한다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지진 사람을 대표한다. ‘황야의 늑대’에서는 한 사람 내면의 두 자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대립되는 두 자아가 독립적인 두 사람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는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르치스와는 반대되는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방랑과도 같은 인생의 긴 여정을 마치고 죽기 직전 어엿한 수도원장이 되어 있는 나르치스에게 돌아와 마지막 조각품을 탄생시키는 장면은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나르치스에게 비친 그 조각품은 자신이 평생 몸을 담았던 지성의 길만이 아닌 그와 반대될지도 모르는 예술의 길로도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작품이었다. 참고로, 예전엔 이 작품이 한국어판으로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각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대변하는 단어다. 그리고 골드문트의 마지막 조각상은 바로 지와 사랑을 모두 겸비한 이미지가 구현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우린 헤세의 합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미안’에서도 미술과 음악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꿈과 함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리는 새 그림 (이 장면에서 ‘데미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구가 등장하게 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다”)과 사람 그림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싱클레어의 개성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가 그린 사람은 그렸을 당시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 너무 닮았음을 알게 된다. 비가시적인 아프라삭스는 가시적인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싱클레어에게 개성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스토리우스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과 음악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의 일부분과 작업 노트가 일부 소개되어 있다. 헤세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정수가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에 위치한 중학교로 부름 받기 위해 어느 날 음악 명인의 방문을 받고 테스트를 받았던 부분이 바이올린 연주였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에 가서도 음악과 라틴어에서 최고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유리알 유희를 알게 되고 그는 그것의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유리알 유희란 모든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고, 고도로 발전된 어떤 기호와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비밀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적 유희이다. 이를테면, 천문학과 수학과 음악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총체적이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서양의 문화와 전통뿐만이 아닌 동양의 지혜까지도 균형 있게 포함하고 있기에, 유리알 유희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순수한 인간의 정신성을 대변하고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책에서도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묘사되지 않을뿐더러 헤세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놀이이기 때문에 구름 속에 있는 듯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음악이 여러 학문들의 조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작품 속에서도 헤세는 음악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게르트루트’는 ‘쿤’이라는 한 음악가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이다. 쿤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그와 대립되는 성향의 ‘무오트’라는 인물 역시 오페라 가수로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술가,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음악가의 두 스펙트럼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르트루트’라는 한 여인들 두고 벌이는 두 음악가의 경쟁 구도도 엿볼 수 있는데, 소설의 초점은 주인공 쿤의 자아 성장에 맞춰진다. 쿤이 열등감을 가진 자아라면, 무오트는 오만함을 가진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오만함의 주자 무오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열등감의 주자 쿤은 자신의 교만을 이겨내고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비록 게르트루트와 하나가 되는 기회를 놓쳐버리지만 한층 큰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로스할데’에서는 주인공이 화가로 설정되어 있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아들까지도 단념하게 될 정도로 그림에 열정을 쏟았던 요한 페라구트의 선택이 내겐 안타까운 결정으로만 보였던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헤세가 일반 시민성과는 다른 예술가의 정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헤세는 고전 음악에 심취했던 작가였다. 바흐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었고 틈만 나면 연주회를 찾았다. 낭만주의 음악도 좋아했다. 슈베르트와 쇼팽을 좋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헤세의 음악 사랑을 단순히 음악에 대한 메시지로 읽으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헤세는 음악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철학인 합일 사상을 더욱 꿈꾸고 글로 그려내려고 애썼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게 헤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낫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음악은 이성을 통하지 않고 영혼을 곧바로 울린다고 믿었다. 음악만이 가진 초월적인 힘을 믿었고 그것에 심취하기도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어찌 보면 예술은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혹은 글이든 모두 통하는 게 아닌가 한다. 미술가는 그림이나 조각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그리고 작가는 글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결과물이 다를 뿐 모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시간과 공간에 담긴 이미지를 담고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헤세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군요, 하는 정보를 하나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헤세는 예술가로서 다른 예술 분야인 음악과 미술과 조화를 이루며 더욱 풍성한 예술 세계를 맛보고 그것을 살아낸 장본인이었군요,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게 어떨까 싶다. 마치 유리알 유희의 기본 정신이 헤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북하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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