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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크리스티앙 보뱅 저,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고

우리는 모두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살아간다. 유년기를 거치며 성년기로 나아간다. 자크 라캉은 ‘에크리’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재해석하며 ‘언어의 유입으로 인한 주체의 탄생’을 말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환영일지도 모를 그 모습을 따라 상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단계 (상상계)에 머물던 아이는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면서 새로운 세계 (상징계)로 진입하며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상징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이자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하고 모든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인간은 언어에 노출되고 그것의 법에 복종하면서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만에 손에 든, 귀국 후 처음 읽은 책은 한국 오자마자 선물 받은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 중 하나였다. 어느덧 읽기와 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에게 지난 한 달은 가혹했다. 금단현상이랄까.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가족과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 휑한 느낌은 여전했다. 그만큼 수년에 걸쳐 내 일상을 진하게 물들였던 읽기와 쓰기는 마치 공기나 물처럼 나를 그리고 내 삶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인정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성실한 지속의 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은 반복의 힘을. 여백과도 같은 일상의 힘을.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아주 잠시 곁눈으로 공부했던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이 떠오른 건 아마도 이 책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뱅은 유년기를 전체 인생에서 구분 짓는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던 시기를 유년기로 본다. 보뱅에게 유년기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간직된 시기다. 무엇보다 유년기에는 책 (언어 혹은 글로 해석할 수도)이 없다. 그는 말한다.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무한한 공간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유년기라고. 유년기의 아이는 어느 날 언어를 접하게 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유년기의 온전함은 상실된다. 대신 공포를 동반한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비록 맥락은 다르지만, 보뱅에게 있어서도 언어의 역할은 라캉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특히 글을 알게 된다는 것의 의미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지대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어, 즉 글 읽기를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다. 문자의 부재에서 문자의 바다로 건너온다.

온전한 자아가 간직된 시기가 유년기이기 때문에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올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커다란 상실이다. 이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정한 것을 향하지 않는다. 그저 공기처럼 우리 안에 존재한다. 무와 기다림은 함께다. 보뱅은 말한다.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너무나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순수한 힘을 회복시키며, 근사한 것들의 소망이며, 하루하루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며, 생명 그 자체이며,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그러다가 사랑도 떠나간다. 여기서 보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세 동방박사가 찾아온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셋은 유년기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이 책은 서문과 아홉 편의 에세이로 엮어진 짧은 산문집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책, 읽기, 쓰기, 기다림, 침묵, 사랑 등이다. 읽기와 쓰기에 대한 내용이 정면에 드러난 부분을 제외하면, 분량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글이 다분히 관념적이어서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기다림, 침묵, 사랑은 그 의미가 모호해서 이 단어들이 담긴 에세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조차 잘 와닿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저자가 쓴 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홉 편의 에세이를 선택하고 엮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편집자의 취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인 크리스티앙 보뱅이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취한 태도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글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보는 방식, 마치 시를 읽듯, 분석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전체를 느끼면서 감상하는 방식으로 아홉 편의 에세이를 읽어 나가는 게 어쩌면 편집자의 숨은 요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책을 연이어 두 번 읽은 지금은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작품 전체를 시로 감상하기로 하고 두 번째로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의외로 저자의 메시지가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보뱅은 단순히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시인의 감성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작가로서 노래하듯 글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인 우리는 그의 글에서 심오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확대해석으로 굳이 이 작품을 과대 포장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나가다가 섬광처럼 가슴 깊숙이 어떤 문장에 찔리게 되면 책을 놓고 생각에 잠기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중간중간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들이어서 이것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은 나처럼 읽기와 쓰기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특히 이 문장들은 반짝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무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무언가가 반드시 남게 될 것이다. 이에 두 가지 문장만 맛보기로 소개해본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건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아, 이 역설!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진정한 읽기와 쓰기의 시작과 끝!)

보뱅에 따르면, 글을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 우리는 자아의 상실을 겪고 난 이후 끝도 목적도 없는 기다림에 이르게 되지만, 이내 사랑이 찾아와 우리를 인도한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곧 사랑이 찾아온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온전한 자아의 부재는 성숙한 자아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를 매개하는 건 바로 글이다. 먼저는 읽기, 그리고 이어지는 쓰기. 보뱅의 말처럼 기계적인 읽기와 쓰기가 아닌 침묵을 기반으로 하는 읽기와 쓰기, 나 하나로만 가득 찬 읽기와 쓰기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읽기와 쓰기만이 진정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길에 동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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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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