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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찰 (관찰, 성찰, 통찰)의 순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8. 12. 09:34

3찰 (관찰, 성찰, 통찰)의 순서

예전보다 조금 깨어 있다고 해서 깬 사람이 된 건 아니다. 예전보다 조금 이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깨어 있는지 더 이타적인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의 현재를 자기 자신의 과거와 비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비교 역시 상대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 마찬가지다. 한 우물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우물 밖으로 나온 건 아니다. 우물은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현실에 잘 부합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우물 탈출 여정으로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지난한 노력을 통해 하나의 틀을 깨고 나와도 우리가 겨우 얻을 수 있는 건 손바닥만한 자유와 그만큼 더 크게 마주하는 하나의 다른 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깨어 있다든지, 이타적이라든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그 판단은 고작 자기 자신과 비교할 때만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우물 밖으로 나올 때처럼, 첫 번째 틀을 깨고 나올 때처럼 두 번째도 정진할 수 있는지, 예민하게 알아채고 저항할 수 있는지, 앞으로도 계속 주어질 이 과정에서 성실하게 지속할 수 있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좌표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 어느 곳에 발을 딛고 있는지보다 그곳에서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곳을 향해 현재 머문 곳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무한반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지난한 과정 가운데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허무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유머를 견지한 채 동지들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이런 성찰에 실패한다면, 혹은 부정적인 답을 해야만 한다면, 우린 여전히 깨어 있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는 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관찰과 성찰이 중요한 이유다.

통찰은 그다음에야 온다. 비극적인 건 관찰과 성찰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지혜자의 탈을 쓴 채 통찰력을 발휘하는 자들이 이 시대에 너무 많다는 점이다. 과연 그들의 통찰이 통찰일지 나는 언제나 의문스럽기만 하다. 무속적인 차원에서나 신적 차원에서나 설명 가능할 그들의 통찰을 마치 예언자의 예언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두렵고, 심지어 공포를 느낀다.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통찰과 예언의 경계. 스치듯 떠오른 이론가의 아이디어를 통찰이라고 여기는 것, 그리고 그 통찰을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들고 받아들이는 것.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아무리 정의롭고 옳은 말도 힘을 잃기 마련이다. 성내지 마라. 묵묵히 먼저 살아내라. 경솔한 통찰력을 뽐내기 이전에 먼저 관찰하고 성찰하라. 통찰은 자연스레 그 위에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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