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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인가, 하나님인가?

폴 스티븐스, 클라이브 림 공저, ‘돈은 중요하다’를 읽고

돈은 신이 아니지만 신과 같은 지위와 능력을 가진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대부분의 문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돈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넘어 마치 구원자의 자리까지 꿰찬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 현실이다. 

월터 윙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 임을 간파해내며 사람들 인식 저변에 깔린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구원이 마치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힘 (이라 쓰고 무력, 폭력, 권력이라 읽는다)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폭력의 신적인 힘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이름의 종교가 가져온 구원의 열매는 무엇인가. 전쟁 결과 나타난 표면적인 결과는 평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라니.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사용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니. 그렇다. 오늘날 초강대국이자 세계 경찰국가인 미국의 성공은 폭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세계평화로 인해 그들이 취한 이득은 다름 아닌 경제력이다. 미국의 성공은 군사력뿐만이 아닌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며, 이 두 힘은 서로가 서로를 증폭시키고 견고히 한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이 된다. 폭력과 돈은 소규모 조직폭력배에서부터 초강대국 미국에 이르기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구원하는 폭력’에 이은 ‘구원하는 돈’이라는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둘은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최종 심급은 자본이라고 했던가. 권력과 자본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욕망하는 궁극의 힘인 듯해 보인다.

이렇듯 신적인 자리에 오른 돈이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와 만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에 대해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 가능하다. “두 신, 돈과 하나님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이 질문은 비단 비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타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살 수는 있어도 돈의 능력을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셀 수 있는 돈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만 돈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돈을 벌고 사용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돈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취급되어야 하는 걸까.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듯한 이 책은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돈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돈은 어디서 왔는지, 기독교인이 돈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일터 신학자로 잘 알려진 폴 스티븐스와 립 인터내셔널 CEO이자 폴과 같이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 소속된 클라이브 림이 같이 쓴 책이다. 두 저자는 각각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복하게 자란 사람과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대변한다. 1, 2 장에서 짤막하게 소개하는 두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상이한 문화 혹은 상이한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돈은 인생의 목표이자 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문젯거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3장에서는 폴과 클라이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돈의 정체를 물으며 그것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돈은 물물교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돈은 처음부터 중립적이기는커녕 종교적, 영적, 정치적인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성전에서 하나님께만 드려지도록 구별된 존재였다. 돈은 원래부터 거룩한 속성을 띠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참이라면, 오늘날 돈은 에덴동산에 지어진 처음 인간이 그러했듯 과거 어느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성경에 따르면, 구약 시대에 언급되는 부는 대부분 복으로 제시되는 반면, 신약 시대의 부는 상대적으로 문젯거리로 더 많이 다루어진다고 밝힌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난 돈의 타락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돈은 이미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타락의 부작용은 성속 이원론으로 이어졌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난해한 이유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돈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고 속되었으니 절대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는 걸까. 세금만 황제에게 내고 십일조와 기타 헌금만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걸까. 저자는 이 말씀이 구약이나 그리스 철학, 혹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 등에 기반한 성속 이원론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파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앙과 삶의 철저한 통합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은 돈이 물질적 은혜와 영적 은혜를 하나로 묶고, 물질적 영역과 영적 영역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황제는 분리되지도, 하나로 합쳐지지도 않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의 기원에 거룩함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4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

5장에서는 돈보다 더 큰 개념인 자본을 언급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것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찰하고,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오늘날 가장 큰 하나의 종교로 등극한 듯한 자본주의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이마시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좋든 싫든 우리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잘하기 위해, 저자는 자끄 엘룰의 주장을 빌려와 개인적 성찰을 통해 돈을 늘 그에 합당한 자리에 두고, 돈을 다루는 것과 관련해서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금은 두루뭉술한 마무리지만, 엘룰의 주장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저자 역시 자본주의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6장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돈의 구속 가능성을 보여준다. 착한 주인과 불의한 청지기의 대립 구도로 흔히 알려진 이 난해한 비유에 저자는 전복적인 해석을 가한다.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 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악한 사람은 청지기가 아니라 오히려 남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받아내며 이득을 취했던 주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되면 채무자들이 내야 할 돈을 깎아주었던 청지기는 악한 주인이 행한 불의를 바로잡은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전복적인 해석은 곧바로 이어지는 누가복음 16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를  한결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돈을 써서 우정을 사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돈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돈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힌트가 된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천착하고 그것을 숭배하게 되면 모든 것이 물질화, 상품화, 비인격화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돈을 소유하고자 했던 욕망의 끝엔 돈의 소유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다. 저자는 7장에서 이러한 돈의 사회적 가치와, 돈이 각기 다른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8장에서 다시 청지기 개념을 주목한다. 6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8장의 소제목 “결국 누구의 돈인가?”는 저자의 결론과 맞닿아 있다. 그 결론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즉, 돈의 주인도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김 받은 존재다. 셋째,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은 돈을 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웃을 돕기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사에 의해서. 그리고 저자는 청지기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제자도의 온도계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며, 어려운 이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이분법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나눔과 구제와 기부 등 일련의 행위로 구성되는 사랑의 실질적 표현일 것이다.

9장에서 저자는 번영신학의 기원과 폐단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번영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짐은 물론이며, 물욕과 자기애를 거짓 거룩함과 거짓 사랑으로 포장하여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열망을 낙관주의, 출세, 물질주의, 웰빙과 결합시켜 만들어낸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거기엔 돈만 있을 뿐 예수님은 없다. 구원하는 돈의 신화만 있을 뿐 구원자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없다. 그리고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이 시대 기독교의 위태로운 입지 역시 번영신학의 여파라고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번영신학에 천착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돈을 신으로 받드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해방받아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10장에서 저자는 이 책의 결론에 다다른다. 예수님은 영원히 지속되는 부를 묘사하면서 두 가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 그리고 ‘하늘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두는 것.’ 예수님이 조금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우리의 양심, 즉 통일된 시각을 갖는 것.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즉 우리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도를 든다. 둘째, 하나님 나라 세계관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방식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성속 이원론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하늘에 투자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네 가지 구속적 행동을 언급한다. 첫째, 돈을 관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 나눔이다. 둘째, 가난한 이들을 도움으로써. 즉, 자선과 구제다. 셋째, 주님을 위해 주님 안에서 행한 일을 통해. 이는 성속 구분을 떠나 행하는 모든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을 지칭한다. 넷째, 이 생애에서 그리고 다음 생애에는 더욱, 우리의 궁극적인 보물은 그리스도다. 바울도 고백했듯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누리라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 저자는 “나는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투자하라고 여러분을 초대한다”라고 말하면서 책을 마친다. 

저자도 책에서 썼듯이,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장이나 구역 모임, 혹은 개인 간에서도) 들어보기 힘들다. 책에 써진 바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서로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어도 수입과 지출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비밀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스러움은 돈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의 제목은 ‘돈은 중요하다’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인 이 문장이 제목으로 충분히 채택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암묵적인 비밀스러움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갈등을 거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이 많으리라 예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암암리에 돈을 섬기고 있진 않은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때다. 그리고 저자의 바람대로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돈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것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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