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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과 정원, 일상과 그리움

카렐 차페크 저,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고

저는 과학자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과학자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생물학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무슨 연구를 하냐고 물어온다. 정확한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듯 엉뚱한 질문을 해오곤 한다. 경험상 그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 내가 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질병이나 암 치료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전 사람이 아니라 생쥐로 실험한답니다! 수술하다가 실수해도 고소당하는 일은 없어용). 둘째, 내가 수의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의 건강관리에 대해 묻는 사람들 (개 품종과 이름에 대해서 내가 당연히 다 안다는 전제 하에 질문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저는 그쪽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용). 셋째, 내가 곤충채집가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는 이 곤충 저 곤충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 (그래도 해충에 대해서 묻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정원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여러 식물에 대해 묻는 사람들 (어려운 학명에 대해 묻는 사람도 있었다! 저는 식물학자도 분류학자도 식물채집가도 아니랍니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다시 대답한다. “저는 동물모델로 생쥐를 이용하고 유전자 조작 기법을 동원해서 기초 생물학을 연구하는 실험 생물학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 그러시군요, 라며 말꼬리를 흐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곤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물학자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였다. 지인들과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다 여러 나무와 꽃들이 즐비할 상황이 주어지면 꼭 나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묻는 이가 한 명 정도 있다. 그들은 마치 내가 당연히 모든 식물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나는 조금 피곤해지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들에게 권할 좋은 추천 자료를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런 질문들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정원가에게 해야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저자 때문이었다. 몇 달 전,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인상이 깊었고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 한 달 전 즈음 중고책으로 구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별한 사건을 겪어내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차렐 차페크는 바로 그런 삶을 노래하는 작가다. 

나는 텃밭 철학자를 한 명 알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6년 동안 항상 곁에 있었던, 이제는 가족 같은 분이다. 캘리포니아를 떠나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도 그분과의 이별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그분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토양의 중요성이 강조된 부분을 읽을 때, 그리고 가끔 아침 점심 저녁 남아도는 채소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정원가의 일상을 읽을 때도 나는 그분으로부터 수차례 들었던 비슷한 맥락의 얘기가 떠올라 문득 그리운 마음이 일었다. 그 텃밭에서 난 온갖 신선한 채소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던 그때가 그립다.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아 가족들이 다 못 먹으니 나눠먹자며 직접 상자와 비닐봉지에 넣어 그 채소들을 갖다 주시던 그분이 그립다. 텃밭을 일구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시고 그것을 승화시켜 이웃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주신 그분이 그립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에서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 1월부터 12월 순으로 소개된다. 저자인 카렐 차페크는 정원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빠져들어가게 할 만큼 필력이 뛰어난 작가임이 틀림없다. 유머가 깃든 문장은 익살스러운 삽화와 함께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이 작품은 정원 에세이라기보다는 인문 에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분류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정원가의 삶만이 아닌 그 가운데 스며든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관점이 작품의 곳곳에 빛나는 문장으로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처럼 평범한 정원가의 일상을 읽으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정원가의 일상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속성을 많이 띠는 것 같다. 20세기 초 체코의 정원가와 한 세기 뒤인 현재 캘리포니아의 텃밭 철학자가 상당히 많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는 캘리포니아 텃밭 철학자에게 이 체코의 정원가이자 소설가의 백 년 전 작품을 선물하고 싶다. 몇 달 전이었다면 당장 차를 몰고 가 읽어보라고 이 책을 덥석 주고 왔을 텐데… 아쉽다. 지나온 모든 순간들이 아쉽고 그리운 오늘이다.

#펜열필독약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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