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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인생을 훑다
신형철 저, ‘인생의 역사’를 읽고
평론이라고 하면 나는 왠지 경직되는 기분을 느낀다. 논문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에서 가지는 위상과 평론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내겐 엇비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론은 어렵게만 느껴지고, 고난도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가. 소설이 시보다 좀 더 대중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시는 이해하기 위해라기보다는 느끼기 위해 읽는다는 말까지 감안한다면, 나에겐 시 역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저 너머의 무엇인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든 책은 무려 시에 대한 평론집이다. 시와 평론의 이중창이라… 이 둘의 무게만 생각하면 나는 압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바로 이 책 저자의 이름이다. 신형철. 믿고 읽어도 되는 그 이름. 여전히 나는 시와 평론은 버겁다고 느낀다. 하지만 신형철의 이름 석 자를 신뢰하기에 나는 그의 신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구매하고 말았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는 시를 신형철은 인생에 빗댄다. 인생도 걸어감과 이어짐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별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그래서 불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고귀하기도 한 우리네 인생을 다룬 작품들을 읽으며 인생을 공부해왔던 신형철은 2016년 한겨레에서 ‘신형철의 격주시화’로 연재했던 스물네 편의 글에 새로 쓰고 또 고쳐 쓴 글 몇 편을 더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는 그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 담긴 서른 편이 넘는 시들에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독자인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해석한 인생의 역사를 훑어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를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회라니. 어떤가.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이 책을 펼치고 며칠을 뜸 들인 뒤에야 아끼던 선물 포장지를 뜯는 심정으로 프롤로그를 읽었다. 그 순간 신형철이 쓴 활자는 정확한 펀치가 되어 나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신형철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당한 나는 전율했다.
내가 뜸을 들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기대가 과장된 나머지 혹시라도 실망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내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싶다. 그의 글쓰기는 내게 인문학의 포문을 열어주었고, 산문의 매력에 눈 뜨게 해 주었으며, 문학의 깊고 풍성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마치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나는 신형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글은 딱 세 꼭지에 대해 짧은 감상평을 남기면서 전개해볼까 한다. 서른 편이 넘는, 인생을 담은 시가 소개되어 있지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혹은 내 인생과 강렬한 교감을 이루었던 세 편의 시라 해도 무방하다.
날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만든 프롤로그 제목은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가 갸우뚱하며 마지막 여덟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 (26페이지에서 발췌)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내 생각은 아들과 단 둘이 살아냈던 지난 5년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아들을 잘 보호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책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나는 과연 나로부터 아들을 보호했었는지, 너무 늦어버린 질문이지만, 묻게 된다. 보호자를 자처하고 감당했던 유일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오늘 신형철의 통찰로부터 뒤늦게 알아채버린 탓이다.
감동은 1부 1장으로 연장되었고, 강력한 연타를 맞은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된 시인 ‘공무도하가’에 대한 신형철의 해석이다. 먼저 이 짧고 강렬한 시는 다음과 같다.
|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찌할꼬. | (32페이지에서 발췌)
신형철은 이 시에서 운명 혹은 숙명을 읽어낸다. 이 두 단어는 인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단어이지 않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 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 (34-35페이지에서 발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 꼭지를 마무리한다.
| 상고시가로 함께 묶이는 ‘구지가’나 ‘황조가’와는 달리 ‘공무도하가’만이 언제나 나를 사무치게 한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는 백수광부다. 나는 그의 아내다. 나는 곽리자고다. 나는 여옥이다. 나는 인생이다. | (36페이지에서 발췌)
‘머피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언제나 하려는 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고야 만다는 것. 이는 신형철이 공무도하가에서 읽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 시공간을 차치하고도 인생이란 그 누구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다가가는 그 무엇인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그 무엇. 마치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보이지 않는 묵직한 실체. 나 역시 문학이라는 숲에서 거하길 즐기고 그 안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열매 따먹기 좋아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인생의 맛을, 그 깊고도 오묘한 맛을 더 알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내게 꽂힌 문장이 담긴 글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꼭지다.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 131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
이 글을 읽고 잠시 멈칫했던 이유는 누군가를 증오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가장 증오한다. 그런 나로 살게 만든 당신을 나는 증오한다.’ |
사랑 대신 증오를 대입하고 나니 나는 글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 마음속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결국 나는 나 자신을 함께 사랑하고 증오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간의 본성이랄지 운명이랄지에 대해서. 결국 인간은 전적으로 타자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르시시즘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굴레일 수밖에 없는가, 싶어서 말이다.
이렇게 세 꼭지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고 나니 결국 나도 인생을, 그 역사를 잠시라도 훑은 기분이다. 착잡해지기도 하고 고요해지기도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젠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자 내일의 어제이므로.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살아내야 할 순간은 오늘, 바로 지금만이 존재하므로.
#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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