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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델리만쥬의 향수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 8. 20:52


델리만쥬의 향수

델리만쥬를 처음 먹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기차와 지하철을 한창 타고 다닐 무렵엔 꽤 자주 사 먹었다. 역마다 델리만쥬 체인점이 있었다고 기억될 정도로 그땐 여기저기서 원하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추운 겨울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봉지를 손에 들고 델리만쥬를 아끼는 마음으로 하나씩 입에 넣던 기억은 끝내 향수가 되었다. 11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에서 기차, 지하철 역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델리만쥬 체인점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어제 대전에서 의정부까지 다녀오는 길에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찮게 델리만쥬를 발견했다.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흥분한 나는 얼른 한 봉지를 사서 아내와 장모님께 하나씩 드리고 혼자서 단숨에 다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참 이상했다. 하나둘 먹을수록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봉지를 다 비웠던 이유도 어쩌면 그 맛의 정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궁에 빠졌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델리만쥬가 이십여 년 가까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맛을 오래토록 유지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무언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느낀 건 만족감이라기보다는 상실감이었던 것 같다. 향수에 이끌린 오래된 기억 속 그 맛은 재현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마침내 기억 속 그 맛을 다시 느꼈다는 기분보다는, 오랜 향수가 사라져 버렸다는 기분이 내겐 더 강렬했었나 보다.

델리만쥬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기억의 무게와 그 가벼움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하여. 좀 더 기억에 남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삶보다는 기억에 오래 남는 삶. 그것이 비록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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