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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공항에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 15. 12:37

공항에서

일기예보를 본다. 며칠간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비가 이제 그친다는 소식이다. 7개월 만에 엘에이 날씨와 관련 뉴스를 살펴본다. 폭우가 쏟아졌다는 소식, 과거에 비해 4-6배 가량의 강우량을 나타냈다는 소식, 그로 인해 여러 명이 죽고 실종되었다는 소식… 안타깝다는 생각도 잠시 나는 무척이나 낯설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 세계적인 기후 변화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 아니라 모두 내가 6년간 살았던 장소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소식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있었던 곳, 내가 떠나온 자리에 대한 향수랄까 하는 것들이 또 이렇게 무참히, 그것도 반년만에 사라졌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무언가를 또 잃어버렸다는 기분에 빠진다. 그리고 전 세계에 걸친 변화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의 변화에 이토록 마음을 쓰는 내가 나는 이기적이고 가소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일주일간 일기예보는 보니 내일부턴 예년 캘리포니아의 날씨로 돌아가는 듯해 보인다. 모든 날이 ‘맑음’이다. 나는 또 회상에 잠긴다. 아, 그랬지, 내가 기억하던 캘리포니아는 비현실적으로 언제나 ‘맑음’으로만 가득했던 곳이었지… 그리고 나밖에 모르는 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이 현상을 해석해보려 한다. 내가 방문하니까 캘리포니아의 날씨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구나, 하고 말이다. 얼굴에 살짝 웃음까지 지어지는 걸 보면 나는 정말 미친 놈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날 그나마 객관적으로 알고 있으니. ㅋㅋㅋ

공항에 도착해서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으니 비행기 출발 시간이 두 시간 반이나 남았다. 점심 먹을 시간을 빼도 너무 많은 시간이다. 공항버스가 두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고, 출국 수속도 오 분 채 걸리지 않았던 탓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유롭게 혼자다. 나는 이렇게 혼자가 되면 미국에서의 일상이 자주 떠오른다.

어제는 다음주 있을 구정연휴를 미리 당겨 부모님을 뵙고 왔다. 하룻밤 자고 오는 일정 대신 새벽부터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취하기로 결정한 이후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날이었다. 1박 2일 찾아 뵙느니 당일치기로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을 두 번 갖는 편이 서로에게 부담도 덜 되는 등 여러모로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가격 때문에 못 드시던 맛있는 초밥을 같이 먹었다. 너무 좋아하시는 두 분을 보니 기뻤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부쩍 늙어버린 부모님을 뵈니 마음이 무너졌지만 말이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시간 내어 찾아뵙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겠다. 미국에서 11년간 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불효를 한국 와서도 지속할 순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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