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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자유를 찾는 여정,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

타라 웨스트오버 저, ‘배움의 발견’을 읽고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판 표지에선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에서 붙인 제목 ’배움의 발견‘을 봐도, 부제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를 읽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원서 표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원제 ‘Educated' 오른쪽 아래에 'A MEMOIR'라고 쓰여있다. 그것도 대문자로, 별다른 설명 없이, 덩그러니.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이라는 뜻의 ‘Memoir'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 대한 독법의 시작점이라고.

소설과 회고록의 차이는 허구와 실제의 차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는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회고록 화자의 이야기는 역사성을 띤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저자의 머리만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통과한 인생 이야기인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기로 읽어도 무리는 없다. 진부하지만, 한 시골 소녀의 극적인 성공기 (a.k.a.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야기)로 읽어도 된다. 광고 카피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기까지” 그러나 그렇게 그녀의 사적인 성장 (혹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처사가 되리라는 게 내 지론이다. 내가 제안하는 이 작품에 대한 두 번째 독법은 카피에 현혹되어 단순히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 (혹은 성공) 결과에 집중하는 대신 그녀가 자란 환경, 그중에서도 그녀의 가족, 그중에서도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던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이야기는 저자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인 우물을 벗어나며 수치를 극복하고 자기 객관화를 이뤄내며 마침내 자유를 찾은 대서사이기에 단순한 외적인 성공이 아닌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타라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판 부제에 쓰인 ‘자유의 이야기’라는 표현은 옳다. 이 책은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누리도록 보장된, 그리고 누려야만 하는 내/외적 자유를 막고 통제하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경도된 사상과 이념 및 신념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발이기도 하다. 낯설기만 한 문화 속 이야기에 우리가 이토록 공감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비록 상황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우리 주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슷함은 일차적으로는 제목에 나와 있듯 교육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도 공유하고 있는 깊숙한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아이다호 출신이다. 아이다호는 미국을 이루는 50개 주 중 북쪽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면서 북동쪽으로는 몬태나, 남동쪽으로 와이오밍, 북서쪽으로 워싱턴, 남서쪽으로 오레건, 서남쪽으로 네바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유타, 이렇게 총 6개의 주와 접하고 있는, 미국 전체에서 볼 땐 북서쪽에 위치한 주이다. 캘리포니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을 가졌지만 인구는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은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에서 11년간 살면서 나는 아이다호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사 먹은 감자는 대부분이 아이다호산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저자의 문체에 강하게 이끌렸는데, 그건 아마도 아이다호만이 가진 천혜의 자연, 특히 인디언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맥, 그중에서도 저자의 집이 위치했던 벅스피크 주위의, 황량함이 느껴질 정도로 여백이 풍부한 공간에 대한 묘사와 그로 인해 떠오르는 원시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녀의 가족 모두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장면이 묘하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공감각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다호가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아이다호로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해석된 아이다호의 벅스피크는 두 가지 사뭇 상반된 이미지를 띠게 되었다. 하나는 프롤로그에서 느꼈던, 미개척된 원시림의 이미지였다. 그곳은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나 그랜드 캐년 앞에서 느꼈던 자연의 웅장함과 연결되는 동시에 인간의 미약한 존재를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기회만 된다면 나도 타라처럼 벅스피크가 만들어내는 계곡이나 산기슭에 발을 딛고 눈을 감고 바람과 산과 하늘과 물을 느껴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그곳에 정착하여 오래도록 대를 이으며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생성되는, 어쩌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타라의 환경은 몰몬교라는 종교다. 물론 이 책은 신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몰몬교의 신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이 글에선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대신 몰몬교 신자들이 주로 하는 행위, 사고방식, 생활습관들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 대변되며 타라의 자유를 억압했던 사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원제를 빌려 이 실체를 표현하자면 ‘Uneducated’라고 할 수 있을 그것은 바로 무속적인 신념, 근본주의적인 신앙,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 일루미나티 음모론, 정부와 병원 등을 사회주의나 악마적인 존재와 동일시할 정도의 확증편향 (그래서 타라 가족은 아무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죽기 직전에 가도 마찬가지다. 예방 접종은 외계인 혹은 간첩들 혹은 공산당이나 하는 짓거리일 뿐이다) 등이 제멋대로 짜깁기된 그 무엇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까지 더해진 가부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평생 자기가 믿어왔던 안전한 우물만이 안전지대라고 믿고 가족들이 그 안에서만 살길 원한다. 평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을 대비하며 비상식량과 비상무기 등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타라의 성장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여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외적인 아버지와 내적인 아버지는 육과 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시도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타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것을 해낸 것처럼 보인다. 내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그녀는 외적인 아버지를 재해석한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그러나 벅스피크처럼 너무도 거대하여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라는 깊은 우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동정의 대상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일곱 남매 중 타라를 비롯하여 집을 탈출한 리처드와 타일러는 대학 및 대학원 교육을 받았고, 나머지 넷은 정도만 다를 뿐 끝까지 아버지의 법 안에서 조금씩 위치를 바꿔갈 뿐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한 상태로 아버지와 함께 제2의 아버지처럼 살아간다. 타라는 그 간격이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타라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1986년생이고, 현재 서른일곱이며, 이미 관계가 단절된 그녀의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가 여전히 살아있다. 타라가 용기 내어 시작한 이 뜻밖의 여정이 나는 타라뿐만이 아니라 타라의 가족을 포함한 제2, 제3의 타라의 아버지들에게 부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모두가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제2, 제3의 타라가 되길 바라게 된다. 타라의 아버지가 타라가 되는 여정이 그들 모두에게서 시작되길 기원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대부분 타라의 위치에 나를 대입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흔여섯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나를 타라의 아버지 위치에 대입하기도 했다. 타라와 타라 아버지 사이의 싸움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지금도 현존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해 있던 깊고 거대한 우물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타라이기도 하고, 그런 타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계속 우물 속에 가둬두려고 하는 타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둘 사이의 싸움은 내 안의 두 자아 간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모순 가득한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고전문학이 아닌 생판 모르는 아이다호 출신 한 여자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다. 뒤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이 책을 모두에게 추천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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