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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성품의 변화 vs. 세계관의 변화

가난한선비/과학자 2024. 5. 19. 17:19

성품의 변화 vs. 세계관의 변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는 어떠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동의하고 전제로 두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차이는 반드시 나고 나야만 한다는 것.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동의가 안 된다면 이 글은 패스하시길.

차이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장소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다. 예수를 영접하면 마음과 생각에 나 뿐만이 아니라 성령이 추가적으로 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대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영접한다고 해서 내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 자아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없다. 차이는 주로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난다. 우리가 흔히 성화라고 부르는 과정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인생 전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는 성화의 유무로 볼 수 있겠다.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 같다. 첫째, 인격 혹은 성품의 변화. 둘째,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변화. 여기서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첫째가 둘째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둘째가 첫째보다 우선해야 된다는 게 아니다. 둘은 동시에 일어난다. 다만, 둘의 속도는 개인마다 다른 것 같다. 또한, 사람마다 두 가지 변화에 가중치를 다르게 두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성품의 변화에, 또 어떤 사람은 가치관의 변화에 더 중점을 둔다. 참고로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나 같은 경우, 스스로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의 회심이라고 판단할 만한 시기에 경험했던 변화는 인격 혹은 성품의 변화가 아닌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변화였다.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지는 변화는 내겐 영원한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성령의 인도와 역사를 체험한 것 같다고 믿고 있다. 기존에 가졌던 우선순위가 바뀌고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져서 순간순간의 선택이 조금씩 바뀌는 경험은 적어도 내겐 회심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인격과 성품 부분에서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음을 느낀다. 그러나 나에게 그 변화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와 그것에 따른 삶을 살면서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느낌이다. 

나와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줄 안다. 성화라는 단어를 인격 혹은 성품의 변화로만 해석하는 부류가 은근히 어르신 중에 많은 것 같다. 이런 이들은 얼굴이 밝은지 어두운지, 웃음기를 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 얼굴은 내면의 거울이라는 문장을 진리의 말씀 삼아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늘 해맑게 웃는 사람을 나는 바보 또는 호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웃음은 성령의 열매가 아닌 인본주의의 극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혜로움이 아닌 어리석음에 가깝다고 본다.

인격 혹은 성품의 변화를 강조하는 부류가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복음은 다분히 사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늘 자기의 얼굴 표정을 비롯한 품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들은 그 문제의 본질을 주목하기보다는 그 문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논쟁이나 토론을 피하기 위해, 어떤 싸움이라도 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덮어두고 참거나 아무 기준 없이 자기 탓을 한다거나 불필요한 사죄를 하는 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부류의 일상적 삶은 어떠할까? 다시 말해, 인격 혹은 성품의 변화를 강조하며 그것을 실천해가고 (?)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할까? 이런 사람들은 과연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할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채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윤리나 도덕의 종교 혹은 착한 사람을 양산해내는 공장 정도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삶을 보기보다는 우리가 흔히 아는 백인 남성에 컬이 들어가 있는 금발 머리의 인자한 얼굴의 예수를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것이 그들 신앙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착함이 아닌 바름을 추구하고 허울 뿐인 착함에 저항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은 착한 삶보다는 바른 삶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부족한 건 착함보다는 바름일 것이다. 그리고 바름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내는 동력이야말로 성령의 능력일 것이고, 그 삶이야말로 복음의 공공성에 부합하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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