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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찰: 받은 것을 돌려주는 글
매일 가던 길을 가면 보이지 않는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어떤 변화가 주어지면 그제야 그 차이를 기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그 차이만 보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그것조차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익숙한 것들은 가려지는 법이다. 낯섦이 눈을 연다.
성찰의 글은 보고서나 논문 같은 실용적인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글쓰기의 기본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성찰이 글쓰기의 시작은 아니다. 성찰은 뇌에서 일어나는 프로세싱에 해당될 뿐 입력 행위는 관찰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찰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관찰은 성찰에 우선한다. 나는 글쓰기의 좋은 시작은 관찰이라고 믿는다. 또한 나는 좋은 관찰은 좋은 성찰로 이어지기 쉬우며 좋은 글로 연결될 확률도 높인다고 믿는다. 먼저 무엇인가가 보여야 하는 것이다. 감은 두 눈을 뜨고 애정 어린 사진작가의 마음으로 관찰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관성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기에 익숙함이라는 관성에 인간의 눈은 정도만 다를 뿐 가려지기 마련이다. 정착하여 안정된 삶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의 글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갇힌 그 좁은 세상만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그런 글도 큰 범주에서 보면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코 통찰에 이르진 못한다. 통찰은 객관성을 띠어야 하며 타자에게도 울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물 안에 갇힌 자의 글은 결코 우물 밖 세상에 울림을 줄 수 없다. 성찰에 그치는 글의 끝은 개인적으로는 나르시시즘에, 사회적으로는 극우보수를 향하게 될 확률이 높다.
관찰로 시작해 성찰을 거쳐 통찰로 나아가는 글을 지향한다. 이는 자연친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외부로부터 받은 (관찰) 어떤 것을 자신의 내적인 경험과 지식을 통해 사유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친 후 (성찰) 자신만이 아닌 타자와 세상을 향해 어떤 울림이 되는 목소리를 외부로 내게 되는 과정 (통찰)은 곧 ‘외부-내부-외부’의 연쇄를 거치기 때문이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 나는 이것이 글쓰기의 바람직한 방향이지 않을까 한다. 앞에서 말한 성찰에 그치는 글은 ‘외부-내부’의 닫힌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고인 물이 되고 그 결과 비대해진 자아와 과장된 사회를 만들어내기 쉬운 것이다.
관찰, 성찰, 통찰, 나는 이를 삼찰이라 부른다. 글쓰기를 즐기는 분들은 꼭 한 번쯤 숙고해 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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