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monologue

사과는 굴욕이 아니다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5. 20. 18:56

사과는 굴욕이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원래 저랬다는 말보다는 저 자리에 가서 바뀌었다는 해석이 더 믿을 만한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바뀌었다는 말은 원래 안에 있던 게 밖으로 나온 걸 수도 있고, 없던 게 새로 생긴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있던 건지 아닌 건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욕망으로, 특히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욕구와 달라서 인간만이 가진다. 생물학적인 필요가 아닌 타자에 의해 생겨나는 탐욕이 욕망이다.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상대적 결핍 혹은 상대적 박탈을 느끼면서 마치 부족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르네 지라르는 ‘모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어온다. 우리가 명품백을 든 사람을 보고 나도 명품백이 들고 싶어지는 이유는 명품백의 가치에 있다기보다 그 명품백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라는 개념이다. 명품백을 든 사람을 모방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를 모방 욕망이라 한다. 

그러나 모방 욕망 때문에 명품백을 비싼 돈을 주고 사게 되어도 기대했던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즉 욕망의 대상을 가졌다 하더라도 욕망을 매개하는 자가 되지 못한 비극이야말로 모방 욕망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자존감과 자존심의 대비와 연결시킬 수도 있다. 결국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과 진짜 내 모습과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의 중요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 가더니 불의하고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서도 사과를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마치 그 자리에 가면 사과 따윈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모양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사과를 굴욕이라 여긴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사과는 굴욕이 아니다. 사과할 일이 분명히 생겼는데도 이를 묵과하고 그냥 넘어가는 행위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굴욕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인간스러움을 자처하는 것이다. 목이 곧고 배가 나온 자들이야말로 인간 말종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기름진 비갯덩어리에 미끄러져 목이 부러질지어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발적인 결핍  (0) 2025.05.29
대체불가능성과 개성화  (1) 2025.05.26
북클럽 강연 후기  (0) 2025.05.20
누군가의 그림자를 온전히 끌어안아 본 적이 있는가  (0) 2025.05.18
공정에 객관성을  (0) 2025.05.17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