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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멈춘 것 같은 시간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5. 25. 15:50

멈춘 것 같은 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날씨며  몸이며 기분까지 모든 게 완벽한 날, 아무런 일정도 없어 모든 시간이 내 편인 것 같은 날이면 더욱 그렇다. 무엇을 해도 아쉬울 것 같은 날. 이럴 때 그나마 덜 아쉬운 감이 들기 위해 나는 주로 두 가지를 한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책을 한두 권 들고나가 한적한 야외에서 독서를 즐기거나. 누군가는 무료하게만 느낄 수 있을 이런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남다른 고요한 평화를 누린다.  

어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완독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감상문으로 독서를 마무리한 뒤 얼마 전부터 아껴가며 읽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을 백 페이지 가량 읽었다. 다 읽어 버릴까 봐 책을 얼른 덮고, 머리를 식힐 겸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를 꺼내 들어 백 페이지 가량 읽었다. 그랬더니 오래전 서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그리고 대학생 시절, 부산 서면에는 그 당시 가장 큰 두 개의 서점이 있었다. 영광도서와 동보서적. 나는 주로 동보서적에 가서 두세 시간씩 보내곤 했는데, 집 밥을 먹다가 가끔 외식하고 싶을 때처럼 서너 번에 한 번 꼴로 영광도서를 찾았다. 지금도 그날들은 화사한 파스텔톤의 그림 하나로 기억된다. 

서점에 갈 때마다 두 가지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하나는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책들 사이에 서 있으면 책들이 갖는 물리적인 무게와 의미의 무게 때문에 나는 그 어떤 책도 손을 대지 못한 채 한동안은 멍하니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정처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삼십 분 정도 지나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제야 관심 있는 책들을 손에 들고 훑어보곤 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책들을 꺼내어 조심스레 책장을 펼칠 때면 나는 어떤 경건한 신도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책이 갖는 존재감이 내겐 상당했다. 다른 하나 역시 압도되는 기분의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책을 다 훑어보고 싶은 마음과 상충되는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내 주머니는 언제나 가벼웠기에 사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서점을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책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밖을 쳐다보면 벌써 밤이 이슥해지던 날들이 아주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과 함께 기억이 난다. 결핍은 어떤 집착 혹은 강박과 이어지기 쉬운데, 그중에는 이런 긍정적인 조합도 존재하는 것이다.  

멈춘 것 같은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책을 읽고 생각에 잠겨보는 건 해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르는 낭만이지 않을까 한다. 만약 그 시간을 유튜브를 포함한 여러 동영상들로 채우게 되면 반드시 공허감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공허감이 아닌 충만함으로 그 시간들이 기억된다. 기억에 남는 삶은 효율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철저히 비효율적이고 철저히 능동적이어야 기억에 남지 않나 싶다. 그런 삶을 살아야 나를 끌어안을 수도 있고 타자를 넉넉하게 품을 수도 있다.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올라가는 시간,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비로소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순례자 신분인 나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간. 멈춘 것 같은 시간의 다른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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