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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이승우 저, ‘캉탕‘을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8. 11. 13:21

세상의 끝이자 시작, 죽음과 부활의 장소

이승우 저, ‘캉탕‘을 읽고

지리적으로 캉탕은 웬만한 지도엔 나오지도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다. 캉탕의 의미는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 속에 녹아있다. 지구는 둥글기에 세상의 끝은 세상의 시작과 같다. 그러므로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세상의 시작이다. 또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끝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어디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어느 곳이나 세상의 끝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시작도 될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캉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바로 세상의 끝이자 시작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저자 이승우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이 시작이라는 것. 끝은 어디든 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가 시작도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인물은 홀수 장 전지적 작가 시점의 주인공이자 짝수 장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인 한중수, 한중수에게 주어졌던 목적지이자 캉탕에 오래전에 먼저 정착한 핍, 그리고 광신적 종말론을 믿고 어쩌다가 선교사가 되어 캉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타나엘, 이렇게 세 남자다. 소설 속 서사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반영한다. 서로 다른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세 사연은 모두 기구하다. 물리적 접점은 없지만 셋은 공통점을 가진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이 공통점이 위에서 질문한 ‘어떤 세상인가?’에 대한 단초다.  

세 기구한 사연의 공통점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세상의 끝 캉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자발적으로 캉탕을 찾은 건 아니었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어떤 반강제적인 힘에 의해 캉탕으로 유입되었다. 인간은 결코 자발적으로 인생의 끝에 서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어떤 이유와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린 끝을 맺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과 성숙, 멸망과 구원,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이다. 

셋 중 캉탕에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된 핍은 수십 년 전 고래잡이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육지에 닿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육지가 바로 캉탕이었다. 핍이 캉탕으로 유입된 것은 운명일 뿐 그가 결코 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캉탕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를 구해준, 세이렌에 비유되는 여인 나야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핍은 나야와 결혼하여 캉탕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다. 최기남이 아닌 핍으로서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타나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어느 날, 종말론을 부르짖는 광신적인 종교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면서 선교사로 훈련받고 타국으로 파송된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었다. 그는 선교사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복음 전파와 개종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교사가 된 게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속히 멸망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게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음에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원했고, 그 바람 가운데엔 자신의 파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무렵 타나엘은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귀국을 명령받게 된다. 단지 선교의 열매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과거의 무언가가 현재로 침투하여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자신의 해임 사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 해임 통지서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주 먼 과거로부터 날아왔습니다. ……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캉탕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 2막이 그렇게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중수는 중요한 발표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등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J가 수 차례의 상담 끝에 한중수에게 일을 당장 그만두고 쪽지에 적힌 주소로 가라고 명한다. 그 주소는 자신의 외삼촌 핍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한중수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언어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다. 그곳이 캉탕이었다. J는 한중수에게 그곳으로 가서 한중수의 건강 회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주문한다. '걸으면서 보고 쓸 것, 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그저 걸을 것.' 한중수는 그 주문대로 실천에 옮긴다. 인생 2막이 낯선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자 다른 과거를 가지고 셋은 세상의 끝 캉탕에서 만나게 된다. 캉탕에서 세 명은 모두 뜻하지 않은 사건과 상황에 엮이게 되면서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게 된다. 그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쓰기가 있었다. 이것들을 다루기 전에 세 남자의 과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핍에겐 고래잡이배를 탔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최기남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 같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었다. 문학소년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모비 딕'을 읽고 난 뒤였기 때문일까. 그는 고래잡이배를 타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십여 년간 고래잡이배를 타다가 캉탕으로 흘러들어온 최기남은 나야를 만나고 핍이 된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때 나야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캉탕 사람들의 말로는 핍은 나야가 죽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한중수가 핍과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보았던 핍은 폐인과 같았다. 최기남으로 살던 시절이 인생 1막이었다면, 캉탕에서 나야와 함께 살던 시절을 인생 2막이라 할 수 있고, 나야가 죽은 뒤 폐인의 삶을 인생 3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핍에게 유혹자이자 구원자였던 나야의 죽음은 핍을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나야와 함께 핍도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핍은 나야가 죽었지만, 죽기 전 나야가 있었던 병원으로 자주 찾아가 그곳에서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나야가 그것을 좋아했었고, 핍은 타자에게 같은 행위를 하면서 나야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캉탕은 핍에게 인생 1막을 끝이자 2막과 3막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곳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나야와 함께 죽었던 인생 2막으로부터 3막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타나엘은 과거 한 여자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삶의 이유를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던 날 마침 그 종교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그녀가 실종된 날이기도 했다. 타나엘이 죽였는지 타자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책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타나엘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타나엘의 인생을 낭떠러지도 떨어뜨린 날로 각인되었다. 타나엘이 몇 년 후 캉탕에서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했던 이유도 그날 실종당했던 타나엘의 옛 애인이 뒤늦게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살인혐의를 쓰게 된 것이었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무렵 타나엘은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그의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진술서를 솔직하게 쓰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없었다. 써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중수의 졸도 사건을 계기로 그는 글이 아닌 발화된 글, 즉 말로써 쓰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극히 낯선 타자인 한중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중수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타나엘에게 먼저 고백하는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한중수는 버러지 같은 아버지의 횡포로 말미암아 젊은 시절을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 때문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죄책감을 포함하여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게 정지되는 듯한 상태로 갑자기 들어가는 병도 얻게 되었다. 사이렌 소리는 어쩌면 한중수에게 있어서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의 자발적인 방어본능으로 한중수를 죽지 않도록 먼저 쓰러뜨리는 방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중수는 그렇게 정신병까지 얻게 되면서 아버지의 망령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했던 친구 J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그 과거의 이야기들을 한중수는 캉탕에서 졸도를 경험한 이후 병원 침대맡에 있던 타나엘에게 고백하게 된다 (이 덕분에 타나엘도 나중에 한중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쓴다).  

핍은 읽어주기를 통해, 타나엘은 말하기를 통해, 한중수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각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솔직하게 대면한다.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글쓰기는 모두 발설 행위다. 발설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세 남자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두운 과거로부터의 탈출, 죄책감으로 물든 숨겨왔던 과거의 종말, 현재의 삶까지 송두리째 갉아먹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의 끝은 곧 과거의 끝이었다. 인생 1막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셋은 모두 과거의 종말을 캉탕에서 맞이했던 것이다. 이를 기독교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죄인으로서의 삶의 종말이라 할 수 있겠다.  

캉탕이 철저하게 낯선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세 남자가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 이 두 가지 ‘낯섦’이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접점을 이루는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 누설될 위험과 왜곡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타자에게는, 그리고 절대적으로 낯선 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저 깊숙한 곳의 비밀도 고백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캉탕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믿든 안 믿든 신이 그들을 캉탕으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여 인정할 건 인정하고 뉘우칠 건 뉘우치고 버릴 건 버리며 새롭게 다시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이다. 인생 1막과 다른 2막을 멋지게 시작하라고 말이다. 두 번째 삶이 허락되었다고 말이다.  

책은 세 남자가 새로운 시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끝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캉탕이 세상의 끝이라고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끝난 곳에서 세상은 다시 시작된다고 믿고 싶다. 세상의 끝에서 쓰기(읽어주기, 말하기, 글쓰기 포함)를 통해 과거 자신의 내밀하고 은밀한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면 바로 그곳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고 믿고 싶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캉탕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약 내가 내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하게 되면, 바로 지금 여기가 옛사람을 끝내고 새 사람을 시작하는 곳일 수 있다. 또한 캉탕은 절대적 낯섦의 공간이다. 절대적 타자는 신이다. 인간은 신 앞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캉탕이다. 정직하게 신 앞에 선 인간은 모두 캉탕에 있는 것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4. 캉탕: https://rtmodel.tistory.com/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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