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6부를 읽고
인생: 스스로 학습하는 지양의 여정
어쩌다 보니 강유원의 '철학 고전 강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비록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지만, 철학적 지식 습득이 아닌 '철학하기'를 배우고 일상에 장착시키고 싶어 하는 비전공자 동료 둘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발걸음이었다. 나는 '철학하기'는 모든 인간이 배우고 일상화해야 하는 근본적인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철학 입문서 한두 권은 훑어보기를 권한다. 단, 혼자서는 어지간한 의지나 계기가 없으면 불가능할 테니 동료들과 꼭 함께 하길 권한다. 함께 읽기는 언제나 힘이 있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마지막 꼭지는 헤겔이었다. 엘에이 근교에 살 때 귀동냥으로 철학 모임에서 약 2년간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중 가장 어렵고 뜬구름 잡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기독교의 교리와 비슷하기도 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 철학자가 바로 헤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강유원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알려주는 헤겔을 읽으면서 이번에도 나는 내 이해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참나…
이 책이 헤겔의 저서 몇 권 일부를 발췌해서 풀어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읽어도 읽어도 내가 글을 읽는 건지 글자를 읽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정신현상학을 뭣도 모르고 읽으려고 며칠을 고생하다가 결국 포기해 버린 내 과거를 떠올리면서, 또다시 하게 되었다. 차라리 헤겔이 내세운 어떤 개념 한두 개를 쉽게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아는 헤겔은 딱 두 가지였다. 변증법과 정신현상학.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신이란 게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다가 (참고로 헤겔은 정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풀어나가는 것 같다. 마치 창세 전에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것이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도, 역사, 예술, 철학 등을 모두 포함한, 다시 말해 이 세상 전체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 우리가 알고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그 정신이 현상되는 여정이라는 것. 이것이 정신현상학을 아주 간단하게 축약한 것일 텐데, 이렇게 해놓고도 나는 무슨 말인지 좀처럼 와닿지가 않는다. 헤겔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왜 굳이 이 세계 모든 것을 정신이라는 이해 안 되는 것으로 다 설명하려고 애쓰는지조차 나는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라는 것,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동급인 것 같기도 하고, 기독교의 신을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 정신이란 게 홀로 존재하다가 만물을 모두 만들었다는 것도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겐 외계어에 불과했다. 정신 대신 기독교의 신을 대입하면 비로소 모든 게 설명될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을 느꼈다.
그러나 이 정신이란 것의 정체를 묻지 않고, 일단 그것의 발전 과정에 대한 헤겔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정신이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계속 이루어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이 지양이라는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먼저, 목적론적이라는 것. 이것은 스스로 완전해지고 진보하기 위한 방향성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나가는 정신의 현상을 설명한다 (참고로 생물의 진화 개념과는 다르다. 생물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무작위적인 속성을 띠기 때문이다). 헤겔이 예로 들었다고 하는 도토리와 상수리나무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도토리의 의미는 도토리의 현재성에 국한되지 않고 상수리나무가 되어 있을 미래성에도 있다는 것. 즉 도토리의 참된 의미는 상수리나무가 되는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지양이라는 개념이 동원되는데, 도토리는 도토리의 현재성을 부정하고 상수리나무라는 미래성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양이란 보존과 폐기라는 정반대 되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 도토리가 씨앗으로써 폐기되어야 상수리나무로 변화할 수 있다. 도토리는 단지 도토리가 아니라 상수리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성장과정의 단면일 뿐 도토리와 상수리나무는 궁극적으로 같은 존재 아닌가. 사람이 배아, 태아, 유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중장년, 노년으로 구분되듯이 말이다. 이는 실재적인 것은 폐기되어도 개념적인 것은 보존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정이 목적론적이라는 것, 계속 상승하는 방향으로 진보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정신이 현상되어 나가는 정신의 여정이라는 것.
폐기와 보존을 동시에 담고 있는 지양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변증법과 같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양이라는 개념을 조금 이해하고 나니 정반합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특히 이 개념을 사람의 인생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 역시 정신이 현상하는 여정 중 하나일 테니) 좀 더 이해가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의 인생도 목적론적이며 지양이라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치는 긴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후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도토리의 형체가 사라지고 싹이 트려고 하는 그 찰나에는 모든 게 부정되고 상실되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양이라는 것은 스스로 학습하여 발전해 나가는 힘을 가지는 것 같다. 지양을 처음 경험할 땐 보존보다는 폐기에 방점을 두게 되어 마치 인생이 실패한 것 같다거나 망한 것 같다고 여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 당시 실패라고 여겼던 순간들이 나중에는 어떤 계기로 작용하여 그땐 결코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주로 상승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상실감은 상실감으로 남지 않고 어떤 생성을 잉태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논리는 내가 생물학에서 발견하곤 하는 파괴와 생성 (혹은 창조) 관계와도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생물의 발생과정에서는 파괴가 파괴가 아닌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다른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쓰이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지양의 자기 학습으로 인한 긴 여정이 우리 인생이라면, 폐기되어야 할 것들과 보존되어야 할 것들, 비록 이 두 가지가 모순처럼 보여 갈등과 위기 가운데 빠지는 순간들에도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일반화를 시켜보면 어떨까?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그 어떤 폐기되는 것도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라고.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보존되어야 하는 것들이 보존되어 지금의 내 인생을 이렇게 수놓고 있는 거라고. 그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불평하고 아파하고 절망했다 하더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들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성숙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있는 거라고. 물론 여전히 이런 것들이 정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상되어 가는 여정이라는 말은 동의가 잘 안 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정도의 일반화된 결론에 이른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읽은 헤겔이 내게 준 의외의 선물이다. 지양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라티오
#김영웅의책과일상
* 강유원의 철학 고전 읽기
1부: https://rtmodel.tistory.com/1996
2부: https://rtmodel.tistory.com/2015
3부: https://rtmodel.tistory.com/2025
4부: https://rtmodel.tistory.com/2039
5부: https://rtmodel.tistory.com/2051
6부: https://rtmodel.tistory.com/2074
'김영웅의책과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다시 읽고 (0) | 2025.12.06 |
|---|---|
| 위화 저, ‘인생’을 읽고 (1) | 2025.11.23 |
| 엔도 슈사쿠 저, '내가 버린 여자'를 읽고 (0) | 2025.11.17 |
|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읽고 (0) | 2025.11.11 |
| 줌파 라히리 저, '내가 있는 곳'을 읽고 (0) | 2025.11.03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