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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교만의 실체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4. 02:04

1. 교만의 과거.

평범한 일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일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효율’이라는 근사한 이유로, 들어가는 시간과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과의 임팩트가 커보이지 않는 일은 맡고 싶지 않았다. 난 비범한 일만을 기다렸고 그런 것만을 하고 싶어했다.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선 겸손하게 보일 줄 아는 위장술도 충분히 익혔다. 오로지 내 눈에 보이는 건 곧 펼쳐질 나의 핑크빛 미래였다.


2. 교만의 현재.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팔짱 끼고 지켜본다. 아직 ‘큰’ 일을 맡기 전이다. 그러나 이 일은 이래야 좋을 것 같고 저 일은 저래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마치 신이 나에게만 비법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꼭 상관에게 이 아이디어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린다. 아무도 모르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스스로 찾은 것만 같다. 야호!


3. 교만의 뒤통수 – 뜻밖의 위기.

뜻밖에도 상관이 먼저 나를 보자고 한다. 시간표도 이렇게 퍼펙트할 수가 없다. 오피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보니 상관은 웃으면서 평가서 결과를 보라며 건네준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나의 역량와 자세에 대한 동료와 그룹리더들의 평가가 일일이 적혀 있었다.


역량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평가 항목들에서 점수가 높았다. 예상했던 거였지만, 객관적인 서류로 내 역량을 수치화한 결과를 보니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 부분에서는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의외의 결과가 만장일치로 나와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의 평가서와 혼동된 게 아닐까 내 신상정보를 다시 확인해 본다. 맞다. 나에 대한 평가서다. 다시 쉼호흡을 가다듬고 결과를 본다. 나의 전체적인 자세에 대한 수치가 기대치 미달뿐만이 아니라 기준 미달로 나와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원맨쇼를 하고 있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상관은 입을 열었다. 이번이 다행히 첫번째 평가 결과이니 한번은 경고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만약 다음 분기의 결과가 비슷하다면 그땐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대꾸할 게 뭔지 눈치챘다는듯 상관은 역량보단 자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나의 개선을 바란다고 했다. 난 한마디도 못하고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오피스를 나왔다.


4. 교만의 자기보호장치 – 점점 두꺼워지는 교만의 철벽 – 자충수.

원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누가 이 따위 평가보고서를 작성했는지 알아볼 작정을 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감히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이건 도저히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제일 학벌도 좋고, 제일 많이 알고, 일도 잘한 덕분에 내 공로에 힘입어 저번 달엔 내가 속한 그룹이 상도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감히 날 이런 상황으로 몰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날 왕따시켜서 자기네들의 밥그릇을 보존하려는 모양새였다. 괘씸했다. 난 이를 갈았다.


5. 교만의 미래 – 자가 파멸 모드: 온.

도저히 명단을 알 수가 없었다. 몇몇 그룹리더들과 동료들을 살살 구슬려서 그 명단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한통속인듯 비밀이라며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


상관의 호출이다. 아직 평가보고서가 나올 때가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왠일인가 싶었다. 저번에 그 말도 안되는 평가서가 잘못된 거라고 내게 사과라도 할 생각이신가? 아님, 내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위로를 해주실 생각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은근 기뻤다.


다시 오피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상관이 커피를 한잔 마시겠냐고 하면서 말을 건넨다. 분위기가 좋다. 분명 좋은 소식일게다. 그럼 그렇지. 감히 내가 누군데…


날 칭찬하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좋았다. 보통 칭찬부터 시작하면 끝은 그 반대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불안이 몰려들었다. 역시나, 아니나다를까,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 그 명단을 물어봤던 동료들과 그룹리더들이 내가 그 명단을 알고 싶어 그들에게 물어봤다는 게 사실이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아차. 망했다.


그렇게 두번째 경고를 받고 오피스를 나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감히. 감히. 감히! 이대로는 여기서 계속 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존심이 있지 잘리느니 내가 먼저 나간다. 곧장 집으로 가서 사퇴서를 썼다. 나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저런 하청업체에서 인정받으려고 했던 내가 못난이지. 그래. 내가 잘못한거다. 날 알아보려면 좀 더 윗물로 가는게 맞아. 엘리트들은 분명 날 알아볼테야. 분노를 속이는 가느다란 웃음이 입가에 씨익 지어졌다.


- 이상 가상 시나리오. 그러나 있을법한 익숙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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