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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하나님의 뜻을 규정짓고 판단할 권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1. 25. 07:53

어느 길 위에 들어섰다면 정진해야 마땅하고, 정진했다면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길 위에 있는 적당한 궤도로 진입해야 그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지 않나 싶다. 연구자라는 길 위에서 프로로 선 지 벌써 10년이 거의 다 되어간다. 여전히 과학자라는 타이틀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궤도에 들어서지 못한 탓일까? 점점 연구에 대한 흥미가 사라져 간다.


최근에 대박날 가능성이 농후한 새로운 발견을 했다. 아무나 발견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방법. 우연히 내게 벌어진 그 사건 이후로 난 나름 블루 오션을 만끽하고 있다. 그 결과, 보스도 흥분하고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난 별로 기쁘지가 않다. 나도 내가 당황스러우리만큼. 재미가 없다. 아, 이를 어쩐다?


포항에서나 클리블랜드에서 겪었던 상처가 도진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 때도 어쩌다가 새롭고 근사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연구에서 난 운이 좀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 근사함 덕분에 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사촌이 땅 사고 나서 배가 아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이건 땅 사기도 전에, 대박의 가능성만 보이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배우고 점잖고 높은 자리 있어도 인간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난 두 독립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경험했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완전 수긍하는 이유도 된다. 인간은 결국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를 빼면 이야기할 것이 없는 존재다. 심지어 선과 악의 구분도 자기 유익에 따라 그 기준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난 이 일에 목격자다. 증인이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이 여기서도 벌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그 대박 가능성이 농후한 프로젝트 말고도, 부차적으로 진행해 오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제출해 본 초록이 억셉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두 스피커로 벌컥 선정이 되어,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학회에도 부득이하게 참석하게 되었다. 12월 초에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ASH라는 학회다 (내가 속한 분야에선 최대 학회). 여기선 다들 난리였다. ASH에서 구두 스피커로 선정이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영광이라며 모두들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정작 난 남의 일인 것마냥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냥 귀찮기만 했다.


교만해진 것일까? 아니다. 이젠 교만할 만한 건덕지가 없는 초라한 CV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PI라도 나 같은 인간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절대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늙고 비싸다. 외국인이다). 물론 인간으로서는 교만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연구자, 과학자로서는 전혀 그럴만한 근거가 없다. 그럼 뭘까? 권태기? 아...


까놓고 말해 난 성공하려고 미국에 왔다 (물론 미국에 올 땐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계획인 것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고급스럽게 말로 포장을 해서 다니던 교회로부터 평신도 선교사라는 임명장까지 받고 왔다. 부끄럽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이름 팔아 먹어 제 영광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서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눈으로 본 성공과 실패가 아닌,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본 모습으로 회복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않을까 한다), 그 결과는 오로지 나에게 주어졌다. 받아들이기 어렵고 싫었지만, 그 긴 여정 가운데 난 새로운 나의 정체성과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좀 더 근원적인 정체성, 본질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되며 그 결과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넘어설 수 있었다.


누구나 바닥을 칠 때를 경험할 때가 있지만, 바닥을 치고 올라올 때는 원래 있던 위치를 찾기 어려운 법이다. 예전엔 안정적이기만 했던 그 자리가 이젠 사라졌을 뿐 아니라 원점이 어디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완전한 떠남은 완전한 나그네 인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난 나그네로서의 삶에서 만족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게 좋아 지속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의 준비까지 되었는데, 갑자기 몇 달전부터 내가 예전에 속해 있었던 것과 비슷한 세계에서 나를 부르는 것만 같은 것이다. 정착하라고. 다시 거기로 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만 같다. 내겐 상처로 도배된 그 곳에서 말이다.


"싫다!" 나의 첫 반응이었다. 빛보다 빠른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두 번이나 연거푸 터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또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 그 예전에 버렸던, 그러나 진화된, 내 모습이 발현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자 섬뜩하기까지 하다.


결국 성공이냐 실패냐, 내가 가진 가치관이 성공지향적이냐 하나님나라적이냐에 상관없이, 그런 것까지도 제한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공지향적 가치관에서 벗어났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뜻을 규정짓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나님나라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고 조금 살아내기 시작했는데, 그게 오히려 내겐 훈장처럼 여겨져 내가 마치 하나님의 계획을 쉽게 알아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많은 묵상을 했다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전보다 더 많이 예수를 닮아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판단할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끊임없이 묻고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답이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발톱의 때만큼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놓칠 때,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인간 안에 내재된 죄악된 교만함은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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