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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장 에스컬레이터 앞에 죽 늘어선 인파 속에 묻혀 있을 때였다. 앞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은 올해 들어 이번이 벌써 8번째 학회라고 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듯한 상대방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은 고작 2번째라고 응답했다. 나도 만약 그 대화에 참석했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난 4년만에 처음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학회에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 4년 중 3년 남짓은 아내를 보스턴에 데려다 준 후, 어린 아들 녀석과 단 둘이서 클리블랜드와 인디애나를 거쳐 캘리포니아에서 힘겹게 살았던 기간이다. 매년 학회에 가도 된다는 보스의 제안을 나는 한사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많이 남아 있던 때라 그랬는지, 그 거절을 하고 나서도 며칠 간은 마치 기회비용을 치른 것처럼 아들 녀석이 밉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처량했던 내 신세가 더 처량하게 느껴졌고, 원한다고 해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나의 의지와 열정을 그냥 마음 속에서 삭여야만 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희생이 있다. 나도 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가족이 당연히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여겨왔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내게 주어졌었고,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면서 사이언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도 아마 조금씩 사라져갔던 게 아니었나 싶다.
아내가 오고 우리가 다시 셋이 된 지 벌써 6개월째다. 그렇다고 그것이 결코 내가 이제 다시 예전처럼 사이언스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핑계대고 싶지 않고,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월킹 & 싱글 대드'로서 이 낯선 미국 땅에서 3년 남짓 동안 육아와 직장 생활을 해내야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내가 운명론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다. 굳이 뭔가를 트집 잡는다면, 내게는 그것 말고도 남들을 납득시킬 이유가 많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임을 안다. 이제는 정말 마음이 편하고 더욱 열리게 됐다. 10년이 넘도록 해 온 일이라고 해서 그것으로만 밥 벌어 먹으라는 논리에도 이젠 더 이상 납득할 수 없으며, 인생이 꼭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야만 더 큰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도 않는다. 인생은 피라미드를 오르는 외줄타기가 아니다. 풍성한 삶을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는 것, 그것에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안다. 성공이 아닌 풍성함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어떤 기간이 다른 기간을 위해 희생되어지는 준비기간이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뭔가를 이루고 성취해 내야만 하는 압박감에서 해방될 수도 있다. 큰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쟁취해야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인생 한 번이니까 큰 것을 목표로 올인하라고? 충고는 고맙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겠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40년 살아보니 인생에는 굳이 큰 문제를 정하고 해결하려고 올인하지 않아도 문제 투성이더라. 주어진 문제만 해결해 나가도 우린 충분히 자신의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계속 과학자여도 좋고, 과학자가 아닌 삶을 산다 해도 좋다. 교수가 되어도 좋고, 성실하게 손만 쓰는 테크니션이 되어도 좋다.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할테다. 마음의 준비가 된 것만 같다.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희망적인 미래를 이야기해 준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ASH 2017은 내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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