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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들이 버려졌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변화가 컸다. 심이 깊게 박힌 티눈처럼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비로소 그 뿌리를 드러내고 참혹히 잘리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 버렸다. 그 죽음이 끝일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버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유아적 생명은 죽어야만 했던 세계였다. 죽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견고한 알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본다. 예전보다 편안해진 모습이다. 조그만 우물과도 같았던 알 속에서 마냥 조급하기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렇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새의 탄생은 알의 파괴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 파괴는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이다.

인간은 어쨌거나 성장하는 법이고, 그 성장은 언제나 두 세계의 만남을 기반으로 한다. 성장은 변태이자 진화이다. 같은 것 같으나 다른, 다른 것 같으나 같은 모습으로의 탈바꿈이다. 단지 수평적인 세계로의 이동이 아닌, 기울기가 있어 보다 높은 차원을 가진 세계로의 상승 진입이다. 그 과정은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래 봤자 좀 더 죽음에 가까워질 뿐이라고 누군가는 조롱할 수도 있겠지만, 흐르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이는 법이기에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자신을 이루는 내면세계는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어찌 보면 무한급수로 이루어진 카오스의 프랙털 모습과도 비슷할, 그래서 부분이 전체의 작은 닮은꼴인 동시에 전체가 그 작은 부분의 모습과도 같은,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과 패턴을 가지는, 그러나 끝내 완성되지 않을 무한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그렇다, 인간의 성장은 신비인 것이다. 그 자체로 신비한 존재인 인간이 ego를 넘어 self의 단계로 진화하는, 처음에는 의식세계가 다인 줄 알았지만 곧 무의식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된 무의식은 해석과정을 거치며 의식세계로 넘어와 의식이 되고, 이는 또다시 하나의 무의식 세계를 넓히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 신비한 일련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숙명이자 바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소설 ‘데미안’은 그저 싱클레어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성장 과정을 시간 순으로 그린 청소년 드라마라든지 회고록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이고도 심층심리학적인, 그러면서도 굉장히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데미안’을 중학생 때 읽었던 과거의 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치관의 큰 변화를 겪어내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현재의 나는 달랐다. 이 책의 심층구조가 보였다. 작가의 의도를, 완전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30년 전보다는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세계라는 개념은 물론, 이 책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보이는, 투쟁하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는 것, 아프라삭스라는 신이나 에바 부인이라는 살아있는 인격체로 표현되는 것이 삶의 전체성이라는 사실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데미안’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던 30년 전에도 이 문구만은 강렬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의 표지에도 투박한 새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던 것 같다. 너무나도 유명한 문구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참고: 아프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적 존재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싱클레어는 크로머 사건 이후 잠시 동안이지만 두 번째로 어두운 세계로의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카인의 표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근간이 흔들리지 않은 채 연극 아닌 연극으로써 방황을 곧 종료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이를 계기로 탄성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같지만 다른, 좀 더 통합되고 성숙해진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힘겨운 투쟁으로 그려져 있다. 그 투쟁의 상징적인 길잡이는 꿈과 기억이고, 목적지는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길잡이가 자극이었다면, 그에 대한 싱클레어의 반응은 그리기였다. 한때 데미안이 스케치를 해갔던, 자기 집 문장에 새겨진 새를 그려나갔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 새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난 이후, 데미안으로부터의 답장이라 여기는 종이쪽지에 적혀 있었던 문구 덕분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새는 다름 아닌, 변태와 진화를 거치며 또 다른 한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려 홀로 투쟁하며 성장하고 있는 싱클레어 자신이 투영된 실체였던 것이다.

청년이 되어 재회하게 된 데미안과의 만남은 유년 시절의 그것과는 달랐다. 데미안은 늘 그랬듯,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신비한 존재로, 하지만 더 완전해진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싱클레어는 예전과는 달리 한층 성장하여 그의 카인의 표가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재회 이전에 싱클레어는 또 다른 내적 성장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 역시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종합해가며 자신의 개성화를 이루어갔다. 그때 역시 싱클레어는 그림을 그렸는데, 대상은 새가 아니라 사람 얼굴이었다. 베아트리체 같기도 하고, 데미안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지만 뭔가 종합적이고 성숙한, 마치 아프라삭스의 얼굴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나갔다. 데미안과의 재회 후 싱클레어는 그 그림 속 주인공이 실제로 살아있는 인격체로도 존재함을 발견하고 경탄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프라삭스는 눈에 보이는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고유한 특징을 인지하고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자신도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고독한 과정. 그 힘겨운 투쟁과도 같은 과정. 카인의 표는 아마도 한 사람의 고유하고도 순수한 특징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데미안은 한 발 앞선, 그러니까 그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시작할 조짐이 보이는 싱클레어와 같은 자에겐 목표이자 길잡이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나타난 시점은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크로머 사건 때문에 처음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되어 방황하고 좌절하고 있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구원자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데미안도 어떤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그저 그 길을 먼저 앞서간, 카인의 표를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싱클레어는 청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모습 속에 데미안이 있다는 걸 발견하며 깨닫게 된다. 즉 이 작품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특정 두 사람의 시시콜콜한 성장 과정이라기 보단, 우리 인간의 보편적이고 숙명적인 성장 과정인 것이다. 싱클레어나 데미안은 모두 인생이라는 곡선의 순간 기울기 값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싱클레어는 용케도 빗나가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그것들과 잘 분별하면서 결국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그래서 데미안이나 에바 부인이나 아프라삭스와도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되지만, 과연 이 ‘긍정적인 결과’도 일반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과정은 힘겨운 투쟁이다. 어둡고 무섭고 강력한 자극, 압도적인 분위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 과정 중 길을 잃거나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 역시 이미 헤르만 헤세도 알고 언제나 카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 책에서는 그 성장 과정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그저 스스로의 내면적 의지에만 호소할 뿐, 그 이외엔 일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마치 뉴에이지 사상이나 한낱 정신 승리의 장난처럼,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 안에는 무한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스스로 신이 돼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그리고 이런 해석과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갑자기 소설 ‘데미안’이 너무 허무해져 버리기까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개성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자아를 발견, 성찰, 성장, 성숙시킬 수 있을까? 원래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서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가치관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어쩌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에 대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세계의 만남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절차를 거쳐 보다 종합적이고 보다 깊고 보다 넓은 가치관으로 진화하는, 두 가치관의 만남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남의 긍정적인 결과는 반드시 이전 세계의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즉,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개성화 과정은 그저 두 세계의 혼합이 아닌 새로운 화합을 약속하는 인생의 여정과도 같으며, 그것은 한 세계의 파괴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조건 역시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알이 파괴되지 않으면 새는 태어나지 못한다. 새의 탄생은 알의 파괴를 반드시 동반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 알이 아닌 새다. 알의 파괴를 슬퍼할 게 아니라 새의 탄생을 기뻐해야 한다. 파괴가 창조의 전신이라 했다. 어쩌면 파괴로 인한 아픔과 고통은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이전 세계에 여전히 몸을 담고 있어 성장과 성숙으로의 진입을 꺼려하는 유아적인 반응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이유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알은 완전히 파괴되어야 한다. 완전한 죽음은 완전한 삶의 시작인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우리 일상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면, 완전한 죽음 가운데 견디며 살아남는 한 가지 힌트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로 타자다. 싱클레어에겐 데미안만 있었던 게 아니다. 에바 부인도, 피스토리우스도, 크나우어도, 그리고 크로머마저도 싱클레어의 성장에 모두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성장하고픈 의지를 갖는다 하더라도 혼자선 불가능하다. 물론 타자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의지가 없으면 역시 성장은 불가능하다. 답은 조화에 있다. 타자를 스승으로 여기기, 타자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지기. 데미안이라는 목적지는 저기 저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한 점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누구나 성실하고 겸손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일 테다. 그래야만 한다. 파괴되는 알 때문에 아픔과 고통에 처할 때에도,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날아갈 때에도 우린 기억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지와 타자의 도움. 이 둘 간의 조화를 이루는 성실함과 겸손함. 데미안으로부터 싱클레어로, 싱클레어로부터 크나우어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 모두의 흐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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