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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 공존과 대립을 넘어.
헤르만 헤세 저, '황야의 늑대'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빛도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빛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인간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프리즘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하게 되는 걸까? 그 분열된 자아는 전체 자아의 일부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수많은 작은 전체들의 집합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 분열된 자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큰 자아일까, 아니면 여러 자아들이 뒤섞인 채 그저 하나의 몸에 갇혀 있는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헤세는 소설을 통하여 과감히 자아를 분열시킨 후 대립적인 성향을 지닌 등장 인물들에게 그의 분열된 자아를 불어넣어 독립된 인간을 창조해낸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 '황야의 늑대'에서도 그는 또 다른 자아를 선택, 증폭, 대립시킨다. 헤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수 있는 자아 성찰, 발견, 성장이 이 책의 중심부에도 굵직하게 뻗어있지만, 이 책에는 그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아닌, '하리 할러'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서 두 개의 자아가 공존, 대립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 자아 중 하나가 인간이 아닌 짐승, 늑대라는 것이다.
'늑대'의 이미지는 타고난 개성을 지닌 채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하는 반면,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이미지는 - 책에서는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 체제와 질서에 길들여져, 어쩌면 클론처럼 독립된 개성이라곤 전혀 없이 획일화된 여느 시민을 대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과 늑대라는 두 자아가 공존하는 장소가 늑대가 아닌 한 인간의 내면이기 때문에 늑대는 아무래도 시민에게 숙주의 컨트롤 타워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늑대의 입장에서 하리 할러의 내면 세계는 맘껏 살기에 척박한 황야가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하리는 결과적으로 자기 안의 두 자아가 만든 괴리감으로 인해 내면의 고뇌를 감싸 안고 한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 인간의 대표격이 된다. 하리는 척박한 세상을 황야의 늑대처럼, 마치 숙명적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헤세가 그의 처녀작,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연의 순수하고 풍성하고 자유로운 감상적 이미지를 강조했었다면, 그의 무르익은 완숙함과 천재성이 단연 돋보이는 이 책 '황야의 늑대'에서는 도시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책을 덮고 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삐쩍 마르고 늙은 회색의 늑대 한 마리가 네온 싸인이 가득한 어두운 도시 한 가운데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늑대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가히 입체적이다. 상상 속 하리의 얼굴인 것 같다가도 늑대의 얼굴은 내 얼굴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황야의 늑대는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되고 억눌린 자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채 외롭고 처절한 방황 속에서 연명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민'에게 꾸준히 주도권을 내어주는 존재, 우리 모두의 내면에도 이와 같은 황야의 늑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세의 자아 분열은 곧 우리의 자아 분열이기에, 우리 내면에서의 여러 가지 목소리 중 시민과 늑대의 채널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면 우린 이 책의 주인공 하리에게 우리 자신을 어렵지 않게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하리 할러'라는 이름의 중년 남성이 그의 쇠약해진 육체와 영혼을 이끌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고향은 하리에게 있어서 젊었을 적 시민의 삶을 영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그 시절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음악과 문학,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자가 되었다. 책도 냈으며 신문에 글도 기고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찾은 고향에서 잠시 거주하기로 했던 곳은 시민적인 느낌을 주는 어느 하숙집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마치 금새라도 산뜻한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청결하고도 모범적인 집이었다.
그런데 하리 안에 있는 늙고 굶주린 늑대의 눈에는 그 집이 너무나도 규율과 규범에 의해 자로 잰듯하여 반듯한 느낌을 주어 신물이 날만큼 역겨운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늑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어 자살이 마지막 해결책이라고까지 생각할 만큼 자신의 과거와 올곧은 시민적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그가 그렇게 시민적인 하숙집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의 안에 여전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안정적인 시민적 삶에 대한 동경과 본능적인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늑대'라는 자아가 '시민'이라는 자아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헤세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두 자아로 인해 발생하는 괴리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이런 복종의 모습은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자연스럽고 안전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역사를 지속해오며 탄탄히 굳혀온 가치체계, 즉 개성을 거세시키고 획일적인 인간의 대량생산을 유도하는 이 시대의 조류 자체가 다름 아닌 '시민의 탈을 쓴 늑대'와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헤세는 하리를 통해 어쩌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이 세상 흐름의 부조리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우리 모두의 고유하고 숭고한 개성의 말살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시민과 늑대의 대립은 결국 시민에 대한 늑대의 현실적인 복종으로 이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늑대의 복종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지 못했다. 하리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책 전반에 걸쳐 하리는 끊임없이 자기 안의 이중성 때문에 고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환상 속 살인까지 저지르는 모습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하리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을 무렵 헤르미네라는 여성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는 자살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정반대된다고 볼 수 있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로 몸을 담그는 시작이었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도 조금씩 하며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 50세가 되기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삶의 빈 자리가 채워져갔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져갔다. 그런 향락적인 삶조차도 또 다른 시민적인 삶의 일환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하리는 예전에 심취했던 고전 음악과 고전 문학에 대한 꿈을 꾸게 됨으로써 하나의 답을 얻게 되는데, 그가 사랑했던 불멸의 위인, 괴테와 모차르트가 각각 다른 꿈에서 나타나 공교롭게도 같은 메시지를 그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가 여태껏 견지해온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나, 헤르미네를 만나고 뒤늦게 배웠던 삶의 자세를 모두 넘어서는 유머, 즉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라는 메시지였다. 차안에도 피안에도 안주하지 않는 삶의 자세, 그것은 곧 시민과 늑대와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였으며, 하리의 분열된 두 자아가 독립적이기보단 서로 보완해나가며 상생하는 하나의 큰 자아를 이루고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난해하게도 느껴졌던 이 책을 읽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우리 인간들이 각기 다르고 고유한 개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우린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를 하나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름의 아름다움을 잡음으로 여기고 재단하려고만 한다면 그런 세상은 프로크루스테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각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각자가 스스로 내면의 자아를 바라보는 눈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프로크루스테스가 키를 잡고 있는 세상은 주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그리고 소수층이 무시되어 언제나 사회에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들이 들끓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곳이기에, 헤세는 '황야의 늑대'를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과 그것의 배후에 내재된 인간의 근원적인 죄된 속성, 즉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실체까지 수면 위로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더욱이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였기 때문에 이미 전쟁을 직접 한 번 겪은 헤세 자신의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그리고 전쟁이 상징하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의 면목을 조용히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황야의 늑대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날로 편리해져가고 외적인 모든 것들은 풍요로워져간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질병으로부터도 점점 해방되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속성은 그에 부응하지 않고 오히려 황야의 늑대처럼 삐쩍 말라가며 방황하고 있진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성 상실, 내면 세계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결과로 타인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는 사건도 일상이 되어간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괴테나 모차르트의 조언처럼 어쩌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일지도 모르겠다. 유머라는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겠지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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