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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기숙사 단지를 조용히 빠져 나와 나만의 한적한 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거기엔 오리들이 새끼들을 몰고 다니는 조그마한 연못도 있었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는 마치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길이 조심스럽게 나있었다. 좁다란 터널 같은 길을 따라가노라면 곧 라일락 꽃이 만발한 탁 트인 언덕을 마주하게 되는데, 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언덕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가 눈에 선명하다. 그곳엔 햇살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불어오는 꽃 향기도 모두 다른 세계의 문을 통과한 것처럼 정화되어 한 폭의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냈다. 그 환상적인 기분은 날 매번 매혹시켰고, 한 동안 난 거기에 강하게 중독이 되어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고요한 평화에 온몸을 맡긴 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파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얀 구름을 눈으로 쫓아가며 공상에 잠기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이따금 새소리도 받아 쓸 수 있을만큼 감상에 충분히 젖을 때면 오토바이를 얼른 타고 기숙사로 돌아와 금새 사라져버릴 시상의 끝을 잡기 위해 글을 써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밀린 집안 청소를 하던 중, 집 밖에 서있는 비에 젖은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런 대학 시절의 꿈 같았던 일상이 떠오른 건 나도 어느덧 여기 따뜻한 나라에 길들여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향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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