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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2.
대학생 신분으로 처음 맞이했던 여름 방학, 난 음료수 사먹을 돈으로 오백원 짜리 동전 두 개만을 들고 거의 매일같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던 버스 정류소에는 내가 늘 타던 버스 노선도 있었고, 항상 보기만 했지 목적지가 달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버스 노선도 많았다. 기껏 내가 버스를 탔던 이유는 서면이나 남포동 주위로 놀러 갈 때나, 한 달에 2만원 했던 단과 학원을 몇 달 다니러 양정으로 오갈 때 뿐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선, 특히 더 이상 부산에 살지 않게 되었기에, 고등학생 때 늘 타던 버스들은 이젠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당시의 주요 목적지는 더 이상 내겐 의미가 없었고, 버스를 탈 이유조차 생소해졌었다.
막상 길고 긴 방학이 되니 딱히 집에서 할 일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하며 회포를 푸는 것도 며칠이지, 거의 두 달 반이 넘는 기간은 사실상 내겐 시간을 어찌 때울까 염려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집 안에만 있자니 부모님께 괜히 미안하기도 했고, 산책이나 나갈 요량으로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예전에 자주 다니던 버스 정류소에 다다랐다. 낯익은 버스들의 종착역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고등학생 때 늘 생각만 하던 궁금증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었다. '아, 저 종점은 과연 어떤 곳일까?'
그래서 하루에 한 대씩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무작정 종점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몰랐었다. 다들 일하는 시간일 평일 11시경, 버스 안에는 여유가 넘쳐 흘렀다. 따뜻한 햇살도 좋았고 기사 아저씨가 틀어주는 라디오 노랫소리도 정겨웠다. 흔들거리는 버스를 타고 거의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기도 하며 종점에 다다르곤 했다. 고요한 평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기분 좋은 게으름.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모든 게 좋았다. 난 그저 계속해서 걸었다. 마치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처럼, 모든 게 신기하기라도 한 듯 몇 시간을 기분 좋은 술에 취한 듯 그렇게 쏘다니곤 했다.
그렇게 몇 주간의 버스 종점 여행을 즐기던 어느 날, 부산에서 미처 가보지 못했던 관광 명소들이 떠올랐다. 가보기로 했다. 아, 그 때 느꼈던 자유함이란! 가보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겐 꿈만 같았다. 고등학생 땐 왜 그리도 정신이 없었을까.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수학, 과학 공부만 해댔을까. 왜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지 못했을까. 이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만큼 그 때 느꼈던 자유함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오늘따라 기억에 남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대청공원이다. 대청공원에 혼자 조용한 평일 오후에 방문했던 그 어느 날이 떠오른다. 그 고요한 침묵, 충혼탑 근처에 서려있는 그 숙연한 분위기. 처음 방문한 곳이었음에도 마치 언젠가 와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 묘한 감정을 느끼며, 난 두 세시간을 거기서 마치 십 분처럼 보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마침내 내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 내게 침묵은 텅 빈 게 아니었다. 감동과 희열로 가득 찬 것이었다.
부모님도 퇴직 후 영천으로 옮기신 바람에 이젠 부산에 갈 일이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가 본 게 아마 10년 전 쯤일 테다. 부산에 가게 되면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니 혼자라도 좋겠다. 여유 있는 날, 버스에 몸을 싣고, 동전 두 개만을 달랑 주머니에 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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