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8년 4월 5일 목요일, 안개 걷힘.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되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혈압을 위해서라도 잠을 자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발표자료를 꾹 눌러 저장하고,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볼 때마다 꼬박꼬박 1시간씩 정확하게 지나있는 놀라운 일을 밤새 3번씩이나 경험했으니, 2시간 이상 연이은 잠은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셈이다. 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서 일터로 향해야 하느라 늘 새벽에 먼저 일어나 홀로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는 아내마저도 오늘은 내가 깨웠다. 깊은 쉼 호흡을 하며 코도 곯지 않기를 바란다는, 아내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잔소리도 오랜만에 들었으니, 분명 내가 코까지 골며 잠을 자긴 한 것 같은데, 그건 가끔 잠꼬대를 너무도 리얼하게 해서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아내가 한 또다른 잠꼬대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뒤늦게 울린 알람을 끄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둘러 아들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미안하지만, 오늘도 turkey sandwich다. 그래도 아빠가 만드는 게 밖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다고 해주는 아들 녀석이 고맙다. 유전학을 전공했던 생물학자로서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분명 인격은 유전되는 게 아닌 게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모든 게 유전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마침 봄방학이라 아들을 캠프에 데려다 주고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싣는다. 여느 때처럼 가방에서 책을 끄집어 든다. 카뮈의 '결혼'의 두 번째 꼭지를 읽었다. 다는 이해가 가진 않지만, 카뮈가 그 글을 쓸 때 침잠했던 감상에 조금은 동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과 인간, 존재와 의미를 독백하는 카뮈의 심정이 이성을 넘어 내 감성을 터치한다. 글은 이렇게 머리를 관통하지 않고 곧장 가슴으로 전달되어 온몸을 확 사로잡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도 언젠간 꼭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막상 발표 시간이 다가오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느 정도의 체념은 삶을 가볍게 한다. 미련 속에 잠들고 싶진 않다. 아직도 영어로 발표하는 것은 어렵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권 문화에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말도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았을 표현도 더 영어스럽게 하려고 나도 모르게 신경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얼마 전부터 발표 준비할 때마다 새롭게 생긴 내 안의 복병이다. 제대로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들을 언제나 익숙하고 편안하게 만들지만은 않는다. 난 언제쯤이면 앎으로 인한 편안함을 느껴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40여분 만에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보스가 오후 4시에 있을 미팅을 상기시켜준다. 이왕이면 준비를 좀 해서 미팅에 참석하자는 말까지 남겼다. 불행하게도 3시간 정도 남았는데, 준비된 게 하나도 없다. 자료가 있긴 한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어 모으고 정리해야 한다. 요즘엔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3개가 넘고, 각 프로젝트마다 일복이 터져서 미처 준비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는 수 있나. 깔끔하게 점심을 포기하고, 대신 자판기에서 형편없게 생긴 차가운 샌드위치를 하나 뽑아서 커피랑 같이 먹어치웠다. 그런데 휴게소에서 홀로 커피를 내리며 샌드위치 봉지를 뜯고 있자니, 시간에 쫓기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서글퍼졌다. 일도 잘 진행되고 있고, 마침 발표도 잘 했으며, 보스와의 관계도 좋고, 보스의 신뢰도 얻었고, 모든 게 좋아 보이는데도, 왜 난 마음이 이리도 휑한 걸까? 마음에 충만하게 담기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마치 의욕 충만한 사람처럼 일을 잘 처리해내는 이 어른스러운 모습은 과연 성숙한 베테랑의 모습일까, 아니면 거짓과 위선에 가득 찬 나의 이중적인 모습일까? 무엇을 해도 태연하게 보이는, 능청맞은 어른아이인 것은 아닐까? 청소년 시기만을 주변인,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마흔에 접어든 성인남자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십이 되면 달라질까?
다시 흔들리는 전철을 타고 정거장에 내리니 마침 farmers' market이 열리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마다 전철역 바로 옆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시장을 열고 자기네들이 재배하거나 추수한 농작물과 과일, 직접 만든 빵이나 고기, 꿀, 양념 등등을 판다.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가득하고, 즐거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아이들이 낄낄대는 소리, 물건 값을 흥정하는 소리로 대기가 꽉 찬다. 사랑스런 아들의 조그만 손을 잡고 축제와도 같은 시장을 잠시 구경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도 많이 파는데, 아뿔싸,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이 1달러 밖에 없었다. 아빠가 현금이 없어서 오늘은 그냥 지나치자는 말에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고 말해준다. 괜히 미안하다. 가끔은 누가 아빠인지 누가 아들인지 헷갈린다.
많은 인파를 헤치고, 축제 분위기를 미끄러지듯이 빠져 나와 20분 정도 더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아내는 오늘도 일이 많아 밤 9시가 다 되어야 도착한단다. 마침 아들이 내일 신을 양말이 없다고 해서 빨래 바구니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꽉 차있다. 아들과 함께 빨래를 돌리고, 저녁은 과일과 우유, 샌드위치와 만두로 때운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간다.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채며 살아낸다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바로 일상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라 믿는다. 다만, 조금만 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소소한 일상에 감동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고 보면 지금이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행복은 현재진행형이어야만 비로소 참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회고하며 뒤늦게 깨닫는 행복은 슬프니까.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 (0) | 2018.04.25 |
---|---|
에레츠학당 글쓰기 네 번째 과제: 일기 2 (0) | 2018.04.20 |
에레츠학당 글쓰기 두 번째 과제: 나는 이렇게 살았다. (0) | 2018.04.20 |
기적을 이루는 조각 (0) | 2018.04.18 |
슈퍼히어로인가, 돌연변이인가? (0) | 2018.04.18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