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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0. 3. 14:26

비.


비가 내려 내면에 숨어있던 슬픔이 조용히 깨어날 즈음이면, 나는 불과 몇 초만에 벌써 그때 그 장소에 가 있다. 내 힘으론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이 기분에 휩싸일 때마다 난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손가락 끝에 걸린 채 나를 옥죄어오는 이 가느다란 실과 같은 지독한 슬픔에 그냥 몸을 내어 맡긴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니와, 발버둥쳐봤자 그것 때문에 더 깊이 패이는 구덩이 때문에 그 어두운 곳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걸 몸소 배워왔기 때문이다. 때론 지혜란 주체로서 어떤 해결책을 찾기 위해 민첩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수고로움에 있지 않고, 객체로서 그저 가만히 주위의 흐름만을 느끼며 일체 저항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에 있다.


그러면 금새 내 코는 비가 올 때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대지의 냄새에 길들여진다. 간간히 바람에 실려 내 이마를 때리는 빗방울에 나의 촉각이 살아나고, 덕분에 난 다행히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사하게 된다. 회색빛 하늘 아래 눈물과도 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이내 굴절이 깊어지고, 난 조심스레 안경을 벗는다. 나도 내 이마도, 그리고 일상에서 내 눈이 되어주던 안경도 함께 젖는다. 비와 하나가 된다.


비가 오면, 평소에 들리던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도, 깨닫고 나면 쉬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고야마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모두 사라진다. 저 깊은 곳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던 내면의 슬픔이 고개를 쳐들 완벽한 시간표가 된다. 몸도 젖고 마음도 젖는다. 비가 내리는 이 고요한 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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