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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죽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1. 10. 03:10

죽음.


늦은 밤, 일 때문에 늦게 귀가한 아내가 오자마자 걱정스러운듯 또 한편으론 다행인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직장에 젊고 창창한 한 여성 리더가 있었는데, 며칠 전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마침 아내는 여기서 20 마일 남짓 떨어진 토렌스에서 엘에이 다운타운 근방을 지나치느라 거의 한 시간 밤길을 운전해서 집에 무사히 돌아온 직후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알다시피 아내는 두 달 전 교통사고도 당했었다), 마침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어서 그랬는지, 내겐 그 상황이 참 묘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난 한 여자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지, 여느 일상처럼 오늘도 무사히 퇴근한 아내의 귀가를 감사해야 할지 망설였던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삶이란 슬픔과 기쁨, 애도와 감사가 따로 구분되어 차례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정도만 달리할 뿐 쌍둥이처럼 함께 온다. 난 그 상황에서 누구나 죽는다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죽음의 시계는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건방지게 지껄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말을 아낄 뿐이었다. 


아내는 내가 일하는 연구소가 소속된 병원에서 일한다. 이 병원은 암 전문병원이다. 늘 대하는 환자들이 암 환자라는 말이다. 죽음이 은밀하게 드리워진 두려움 앞에서 인간은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시인이 되기도 하며 목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는 암덩어리라는 실체로 실재하며 실제 그들을 제압하고 있는데, 이 철학자요 시인이요 목사이기고 한 암환자들은,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유독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민한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 초연해지며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나쁠 것은 없지만, 영과 육을 이분법처럼 구분하는 생각이 인간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건 죽음 앞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걸 이들을 통해 알게 된다. 하지만 암덩어리라는 것이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의 압축물이기에, 그것을 만지고 다루려는 의사 앞에서 그들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조바심에 그 방어가 공격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저 난 이 정도로만 미루어 짐작하고 입을 다물 뿐이지만, 죽음은 분명 인간에게 아주 큰 힘을 행사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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